•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2. 철도로 보는 근대의 풍경
  • 철도 부설을 통한 식민 지배의 강화
  • 철도와 항일 운동
박진희

일본인에 대한 적대 감정은 경인선 철도 부설 과정부터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는 주로 일본인 개인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에 그쳤다. 대한제국에서 접수하거나 발송한 공문을 모아둔 ‘한성부래거문(漢城府來去文)’에 따르면, 1898년 12월에 조선인들이 일본인을 집단 구타했던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일본인 에구치 칸지(江口寬治)가 쓴 『조선 철도 야화』에서도 이토 히로부미가 탔던 기차에 가해진 몇몇 가벼운 피격 사건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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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 개통식
경부선 개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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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부설 철도에 대해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1903년에 미국인이 운행하던 전차 탑승 거부 운동도 일어났다. 미국인들의 전차 종업원에 대한 행패와 전차 사고로 인해 일어난 이 거부 운동에는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황성신문』이 별보를 통해 전차 탑승 거부를 선동하는 통문을 싣기까지 할 정도였다. 심지어 신문물에 관심을 쉽게 보이는 어린이나 젊은이마저도 전차에 타는 사람들에게 돌이나 오물을 던지고 역적이라는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러일 전쟁을 전후해서 반제국주의적 저항은 점차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침략적 성격이 점차 노골화된 데 따른 반작용이었다. 당시 활약했던 농민 조직 활빈당은 일본의 철도 부설권을 노골적으로 비방했다. 그들은 조선 정부에 철도 부설권을 타국에 허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십삼조목 대한사민론(十三條目大韓士民論)’을 요구하기도 했다.

철도 부설이 진행되는 동안, 특히 기차역을 둘러싼 조선인과 일본 정부 사이의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1900년 4월 경부 철도를 부설하면서 터무니없이 많은 정거장 부지(남대문 11만 평, 영등포 6만 평, 초량 16만 평 등)를 요구했다. 이에 철도 연변 주민들이 조직적인 저항으로 맞섰다.

한성부가 남대문 밖 정거장 부지의 민가 철거를 종용하는 계고장을 붙이자 사람들은 이를 떼어 버렸다. 이에 한성부는 주모자 몇 사람을 체포·구금하게 되고, 이에 흥분한 수백 명이 한성부 앞에 몰려가 집단적으로 항의하고 남대문 정거장을 용산으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대한제국과 일본 정부는 협상에 나서, 1902년 7월 말에 약 5만 평으로 남대문 정거장 부지를 축소하는 안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철도 공사장 역시 민족적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던 곳이었다. 강제 부역에 동원된 농민들은 일본 공사장 감독·간부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면서 민족적 자각에 이르게 되고, 조직적인 저항을 감행하기도 한다. 이들은 철도 정거장을 공격하거나 파괴하기까지 하였다. 한일 병합이 있기 전까지 철도 정거장은 철도 연변 주민, 부역 농민들과 의병 부대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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