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2. 철도로 보는 근대의 풍경
  • 철도 부설을 통한 식민 지배의 강화
  • 철도, 산업 지형을 변화시키다
박진희

사람들의 원성을 뒤로 하고 부설된 철도는 식민지 경제 구조를 정착시키는 첨병 역할을 맡음과 동시에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당시 경부 철도 부설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토목건축과 청부 회사가 다수 출현하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철도 공사에 원료와 노동자를 공급하는 용역 회사의 성격을 띠고 있어, 부분적으로 매판성과 봉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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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나루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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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용달 회사·부산 토목 합자 회사·대한 철도 역부 회사 등은 경부 철도 주식회사와 청부 계약을 맺고 일부 구간의 공사에 참여하여 기대 이상의 작업 성과를 올렸다. 이때 경부 철도 주식회사가 일본 토건업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조선 토건 회사에 경부 철도의 건설 공사를 청부한 것은 대한제국의 고관대작을 회유하고 조선인들의 적대 감정을 완화시켜 철도 용지와 철도 노동자를 좀 더 쉽게 확보하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철도 건설이 시작된 1년 후 경부 철도 주식회사는 조선 토건 회사들의 청부를 취소하고 전적으로 일본 토건 회사들과 청부 계약을 맺었다. 결국 경부 철도와 경의 철도의 부설 공사를 계기로 일본의 토건업만이 철도 관련 기술을 축적하여 다른 식민국으로 다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철도는 당시까지 조선 상업 발달에 지배적인 역할을 해온 한강 수운 교통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리나라는 산악 지형과 해안선·하천이 발달한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육상 교통보다는 수로 교통이 유리했다. 17세기 이후 조선에서 상업이 성행하면서, 18세기 이후 수로 유통망이 정착해 가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포구를 중심으로 한 해상 교통망과 장시를 중심으로 한 내륙 교통이 연결되면서 전국적 시장권이 성립되어 갔다. 그리고 경강(한강)은 전국 해상 교통권의 중심지가 되어갔다. 한강 선상은 개화기에 인천에서 국내외 물품을 수송해 서울 시장에 판매하여 부를 축적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철도 개통과 더불어 이런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1900년 7월에 경인선 철도가 완전히 개통된 후 기선(汽船)에 의한 조운업(漕運業)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경인선 개통 이전에는 한강 수운이 매우 번창해 소기선의 왕래가 빈번했다. 철도 개통 초기만 해도 철도 수송의 영향은 미미했다. 선박 운임과 철도 운임에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급한 화물이나 침수가 우려되는 화물 외에는 여전히 배편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에 진출한 일본 상인이 철도 회사와 교섭해 철도 운임을 인하하면서 사태는 달라졌다.

안전하고 빠른 데다가 운임까지 싸진 철도 운송은 한강 수운업에 큰 타격을 가져왔다. 결국 1911년 무렵이 되면, 한강으로는 인천의 추전 상회(秋田商會) 소속의 작은 기선만이 정기적인 운항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밖에도 철도는 조선의 전통적인 도로망의 쇠퇴를 가져왔다. 최대의 간선 도로인 영남 대로(嶺南大路)는 철도 개통 이후 거의 유통로로서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영남 대로는 서울에서 충주와 대구를 거쳐 동래·부산포까지의 길로서, 조선시대 한강 유역과 경상도 사이의 교역과 문화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경부 철도와 경부 국도의 건설로 영남 대로 는 전통적인 상업로(商業路)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철도는 전통적인 직업을 조선 사회에서 사라지게도 하였다. 보부상이 그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보부상은 상거래를 수행하는 이들이기도 하였지만, 정보를 나르는 이들이기도 하였다. 이들이 활동하는 지방 장시는 적어도 5일에 한 번 사람·물자·정보가 모이고 흩어지는 장소로, 정부에서는 왕의 윤음(綸音)·정령(政令) 등 정부 시책을 반포·홍보하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장시는 관의 정보가 일방적으로 전달되기만 하던 곳은 아니었다. 반대로 봉건적인 수탈에 저항하는 민심이 중앙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철도가 등장하면서 장시 이외에 기차 정거장이 이런 소통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보행 교통 시대의 역사적 산물이었던 보부상은 개화기에 어용 단체가 되어 체제 내로 흡수되어 버리고, 철도가 경제적 공간을 재편성하게 되면서 전통 장시는 신흥 상권에서 멀어지면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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