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2. 철도로 보는 근대의 풍경
  • 철도 부설을 통한 식민 지배의 강화
  • 철도, 근대적 시공간의 창시자
박진희

산업에서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을 강요한 철도는, 한편으로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근대성과 조우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철도를 통해 부산의 풍물과 소문이 멀리 북방의 신의주까지 빠르게 전파됨으로써 사람들은 소위 ‘동시성’의 감각을 체험하게 되었다. 대한제국 시대에 발간되던 신문들은 철도를 통해 전국 팔도로 빠른 시간 내에 유포될 수 있었다. 전신과 철도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유대감은 이제 좁은 이웃을 넘어 철도가 이어주는 다른 도시로까지 뻗어가게 될 수 있었다.

철도는 한편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철길이 어떻게 놓이느냐에 따라 신흥 도시가 갑자기 생겨났다. 동시에 전근대적인 물산의 중심지들은 철도가 비켜남에 따라 쇠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철도가 근 대 도시 형성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도 충청권에서 대전과 공주의 성장과 쇠락일 것이다. 철도가 부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가한 촌락에 불과했던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의 분기점으로 선정되면서 새로운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반대로 공주는 급격히 쇠락했고 도청 소재지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갔다. 개항 이전 충청권의 행정 중심 도시이자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던 공주는 1900년대 말 경부선 노선에서 제외됨으로써, 쇠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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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역
경성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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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 철도에 의해 부상한 새로운 신흥 도시는 식민지 근대화의 음영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철도 부설과 더불어 거의 일본인에 의해 창조된 도시 대전은 소위 근대적인 도시의 체계를 잘 갖추고 있었다. 대전역사와 도청 청사 사이에는 넓은 대로가 조성되었고, 이 도로변으로는 각종 공공건물과 상업 시설들이 정연하게 들어서게 되었다.

이들 정비된 도로와 철도망이 주는 근대의 편리함은 식민지 조선인들과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 정비된 신흥 도시에는 일본인 거주 구역이 먼저 생겨났다. 이전에 이곳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 토막민(土幕民)으로 전락했다. 철도가 만들어 놓은 근대적 공간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 내지인과 식민지 조선인 공간의 이중 구조로 변형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상권은 해체되고, 현해탄을 건너온 제품들이 전통 수공품을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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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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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철도 시설 자체가 새로운 공간이 되기도 했다. 철도 역사는 신문화의 문화 공간으로, 사람들이 소통하는 광장으로, 신문물을 접하는 관문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기차역에서 약속을 하고, 지방의 소식을 전해 들었으며, 타 지역이나 외국에서 오는 이방인들을 만나 새로운 문물을 접하기도 하였다. 식민지 기차역은 제국의 욕망을 전시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역(京城驛)은 제국의 심장부에 자리를 잡은 근대성의 시각 공간이었다. 경성역은 근대와 식민 통치의 양면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었다. 경성역은 물자와 문명이 들어오는 통로이자 몰락한 농민과 도시 실업자들의 집합소였다.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근대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구현하고 있는 경성역은, 한편으로 일제의 권위와 능력을 과시하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석조 건축물을 통해 동도서기를 일찍이 체현한 일제의 앞선 힘을 사람들은 느껴야만 했다. 한편, 징용되어 가는 아들과 애끊는 이별을 하며, 식민지의 애환을 체험하는 곳도 경성역이었다. 기차에 실려 만주로 향하는 젊은 청년들을 바라보면서 독립지사들은 이곳에서 항일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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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역 식당
경성역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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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운행과 더불어 한반도에서의 시간의 개념도 변해 갔다. 왕조의 시간은 사라지고, 철도 운행에 편리한 동경 표준시가 들어왔다. 유럽에서 철도의 등장과 더불어 표준시가 지방시를 대체한 것처럼 말이다.

철도를 이용하게 되면서 서서히 조선인들도 새롭고 근대적이며, 기계적인 시간에 익숙해져 갔다. 점심 먹고 오후에 만나자는 느슨한 시간 감각으로는 정해진 시각에 들어오는 철도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차 시각표를 엄수해야만 했다. 철도 이용은 근대적 시간 규율을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

철도와 병행하여 진행된 산업화는 도시 주변으로 공장이 들어서게 하였다. 정해진 시간에 공장으로 출근해야 하는 행위에도 사람들은 익숙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농경 시기의 생체 시계를 대신하여 이제 서서히 사람들은 주 단위와 요일제, 하루 24시간이라는 근대적인 시간 분할제에 익숙해져 갔다. 철도는 이렇게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에 관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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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광지 약도
조선 관광지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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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적이기는 하나 철도는 한편으로 식민지 조선인에게 엄격한 신분 질서의 와해로 인한 해방의 기쁨을 맞게도 해 주었다.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한계가 지어졌던 조선시대의 탈것이 기차의 객차 구조로 변하면서, 양반과 상민의 경계가 사라져버렸다. 열차의 공간은 반상의 구별 없이 만인에게 평등해 보였다. 조선인들 사이의 경계가 사라졌지만, 제국민(帝國民)과 식민지민(植民地民) 사이의 민족 차별은 강화되었다. 일등 칸 승객과 이등 칸 승객의 차이가 철도 공간에서의 새로운 신분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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