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3. 일제 강점기의 과학 기술 교육
  • 일제 강점의 시작과 과학 기술 교육의 저급화 전략
김근배

하지만 1905년경부터 일제가 강요한 과학 기술 교육 체계의 변화는 곧바로 대한제국 초기부터 시작된 각종 과학 기술 육성 정책의 성과를 변형· 왜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주적인 근대 과학 문화 창달을 위한 대한제국의 의지를 싹부터 잘라버렸다.

우선 일본은 1905년의 궁내부 직제를 축소하면서 통신·철도·광업 등의 근대 과학 기술 교육 기관 대부분을 아예 없애 버리거나, 존속시키는 경우에도 단순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전습소로 격을 낮추는 조치를 취했다. 일제는 또한 침탈기 이전에 설립한 교육 기관마저도 개악의 칼날을 들이대어 대한제국이 설립한 교육 기관의 교육 수준을 크게 낮추었으며, 이마저도 일본인이 운영하도록 하여 일본의 식민화 전략을 충실히 수행하는 기관으로 만들었다. 이런 변화들을 대한제국 시대에 설립 운영되고 있던 교육 기관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우선 관립 공업 전습소는 중등 교육 수준의 교육 기관으로 개편되면서 차츰 본토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었다. 정식으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을종이나 준을종 공업학교는 거의 일본인만을 입학 대상으로 하였다. 조선인에게는 과학 기술 교육 기관으로 보기에는 수준도 낮고 학력도 인정하지 않는 하급 수공 인력 양성을 위한 공업 보습 학교나 지방 공업 전습소로 진학하는 것만을 허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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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 전습소 본관 건물
공업 전습소 본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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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식민 지배 체제를 위한 전초 단계에서 양성되어야 할 많은 과학 기술 인력을 조선인 인력의 육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본에서 일본인 과학자들을 직접 데려와서 충원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었다. 누사하라 히로시의 주장에서도 입증되듯이 조선인 과학 기술 인력, 특히 고급 과학 기술 인력의 양성은 불필요하다고 간주되었다. 이에 따라 일제는 대한제국의 교육 양성 제도에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고, 이런 개편은 저급 기술자 양성을 위한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을 우선적으로 육 성한다는 식민지 교육의 기본 방침에 따라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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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고등 보통학교의 과학 수업
경성 고등 보통학교의 과학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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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육 방침은 조선에서의 교육은 우선 일본어 보급을 중점으로 하고, 실제 생활에 쓰이는 지식을 가르쳐 식민지인이 실무에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유케 코타로의 말에 그대로 의거한 것이다. 이는 본국민과 식민지인 교육의 차별화에 중점을 둔 것이다. 즉 본토에서는 과학적 지식인을 양성하고 식민지에서는 오직 본토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는 단순 기술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식민 전략의 취지에서 나온 것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교육 개편은 실과주의, 실업적 교양의 중시, 실학주의적 교육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시행하였다.

실업 교육의 중시는 통감부의 실학주의 교육 정책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조선에서 소위 ‘살아 있는’, 즉 실제 생활에 유용한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학제(學制)를 단순하게 편성하는 한편, 이론 중심보다는 단순한 내용으로 졸업 후 실무에 종사하는 데 필요한 지식만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가 이렇듯 실업 교육을 강조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고등 교육을 억제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고 함양할 수 있는 기회를 통제하였다. 그들은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에 종사할 막대한 하급 기능 인력을 필요로 했다. 즉 일제가 조선에 요구하고 있던 식량·원료 공급지, 상품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관철시키기 위해 교육도 토지 조사 사업, 농촌 개발 정책 등에 필요한 실업 교육에 집중시켰던 것이다.

일본 본토의 산업 정책은 이미 병합 이전부터 조선의 농산물을 기본으로 한 공업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조선에서의 농업 중심 실업 사회화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고, 이에 따라 기술 인력보다는 기능 인력의 양성을 축으로 하는 교육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조선에서의 공업 수준은 농촌 가내 수공업 정도의 낮은 기술을 보급·장려하는 차원이었지만, 원료의 개발이 농산물에서 광산물·가공품 등으로 확대되고, 각종 전습소가 지방 곳곳에서 운영되었다. 1905년 이후 일제는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토지 조사 사업을 추진하여 각종 세원 조사, 군용지와 거류지 확보, 관청 기관의 산업용 부지 마련 등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측량 기술 인력을 많이 양성해야 함을 인식했다.

일제는 1905년 측량 기술 견습소를 설립하고, 1906년에는 대구·평양·전주에도 출장소를 세워 측량 기술 강습을 확대하고 상당수의 조선인 측량 기술 인력을 양성하였다. 조선인 과학 기술 인력의 필요성은 측량 기술 인력의 경우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효과적인 식민 지배를 위해서는 하급 과학 기술 인력과 기능인이 훨씬 많이 있어야 했다.

과학 기술 기관이나 철도·전기·전신·측량과 관련된 업무뿐 아니라 많은 일본 국영 기업과 민간 기업에 속한 공장, 심지어 농업·잠업·수산업에서 이루어지는 경제 활동을 하려면 광범위한 인력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는 하급 과학 기술 인력을 많이 양성하기 위해 견습소와 전습소 같은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이런 견습소와 전습소의 체계적인 운영을 위한 중앙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당시 각종 전습소는 일제가 일본 본토로 수탈해 갈 원료를 가공·개량하기 위해 전국 각 지방에 개설한 것으로, 경성의 관립 공업 전습소도 이러한 지방의 전습소와 같이 농가 부업적인 수공 기술을 익힌 공장 직공이나 하급 기능공을 양성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그렇지만 관립 공업 전습소는 지방 전습소에 파견할 기술 지도 요원을 양성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기술 전 습만을 하는 지방 전습소와는 달리 어느 정도 공업 기술 교육에 관한 교과 과정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이 기관은 고등 공업 전문학교가 없었던 상황에서 공업 기술 교육의 모태 역할을 하였다.

1906년 8월에 설립된 관립 공업 전습소에는 본과·전공과·실과의 세 과정이 있었다. 수업 연한이 2년인 본과는 전문 학과 또는 전습 과목이라 불리는 염기·도기·금공·목공·응용 화학·토목 등의 여섯 개 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실습 위주의 수업을 하였다. 입학 전형에서는 공업에 종사하는 집안의 자제와 장래 공업이나 공업에 관련된 직무에 종사할 자를 우대하였고, 졸업 후에는 전습을 받은 기술 분야에 1년간 의무 종사토록 하였다. 결국 공업 전습소는 총독부 사업에 필요한 기능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치되었고, 이 과정에서 낮은 수준의 공업 기술 교육이 이루어졌다.

침탈기 일본에 의한 고등 기술 교육의 억제를 잘 보여 주는 사례가 또 하나 있다. 일본 정부가 1907년에 마련한 유학생 규정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고등 기술 교육을 받고자 하는 조선인이 늘어만 갔고, 많은 사람이 일본 본토에서 이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했다.

이에 고등 기술 교육을 억제하려는 일본 정부는 1907년에 유학생 규정을 만들고 이듬해에는 개정안을 마련하여 공포했는데, 개정안은 관비 유학생의 학력 자격을 강화하고 학비를 삭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또 관비 유학생은 물론 사비 유학생도 품행과 수업 상태를 조사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는 결국 조선인의 일본 유학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관비 유학생을 선발할 때 대학 이상의 고등 교육을 이수하기 원하는 자는 제외하고 전문학교 수준의 이수를 희망하는 자만 선발하였다.

이로써 관비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에 있는 대학의 이학부와 공학부에 진학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을 뿐더러 일본에 있는 이공계 대학의 진학도 1920년대 중반까지 완전히 차단되었다. 따라서 조선인이 일본의 이공계 대학에 특과가 아닌 본과로 진학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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