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3. 일제 강점기의 과학 기술 교육
  • 한일 병합 후 일본의 과학 기술 교육 정책
김근배

1910년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후 일제는 조선의 과학 기술 인력 양성 체제를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개편하였다. 근본적인 개편의 필요성은 식민 지배 체제에도 단지 하급 과학 기술 인력뿐 아니라 고등 과학 기술 교육 기관을 졸업한 다양한 고급 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라는 일본 제국 정부의 판단에서 나왔다. 이는 또 본국 산업 구조에서 조선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 점차 확대됨과 동시에 다원화되면서 대한제국을 침탈하는 시기에 과학 기술 교육의 근간을 이루었던 초·중등 중심의 기술 교육만으로는 변화된 상황에 보조를 맞출 수 없게 됨에 따라 나온 것이었다. 이런 정책적인 변화는 조선 총독부의 과학 기술 교육 정책에 곧바로 반영되었다. 우선 중앙 시험소 설립을 예로 들 수 있다. 조선 총독부는 1912년 공업 전습소의 실지 기술 지도 업무, 광물 조사, 양조 시험 사업을 통합하여 관장할 중앙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 산하에 중앙 시험소를 설립하였다.

이 중앙 시험소는 “조선 총독의 관리에 속한 공업에 관한 시험·분석과 감정의 사무를 담당한다.”는 설립 취지를 가지고 출범하였다. 중앙 시험소에서 관장했던 업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 자체적인 시험 연구 보고, 둘째 의뢰받은 상황을 분석·시험·감정하는 업무, 셋째 전국 각지에 기술원을 파견하여 실지 지도하는 업무였다. 부서별로는 분석 시험부, 양조 시험부, 염직 시험부, 요업 시험부, 응용 화학 시험부가 있었다.

이러한 시험·분석·조사 업무 중에서도 1910년대 중앙 시험소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광물 조사 사업이었다. 중앙 시험소는 일본에 있는 도쿄 공업 시험소를 모델로 설립되었지만 본토에서와는 달리 새로운 공업 분야를 선도하는 시험 연구 기관으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도쿄 공업 시험소는 산업 발전을 이끌어 가기 위한 연구 인력 개발 기관이었지만, 조선의 중앙 시험소는 1910년대 총독부에서 실시한 원료와 지하자원의 조사 사업과 농촌 재래 공업의 지원 사업에 이용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조선의 중앙 시험소는 일본의 식민지 수탈을 담당하는 조사 시험 위주의 기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제는 농업과 공업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법학·의학·상업 분야에서도 대한제국 시대에 설립된 각종 교육 기관을 개편하고 이를 운영할 하급 요원을 양성하였다. 1895년에 설립된 대한제국 사법기관 평리원(平理院) 부설 법관 양성소를 경성 전수학교로 개편해 관청에 근무할 하급 관리를 양성했고, 1899년에 발족한 경성 의학교를 대한 의원 부속 의학교로 바꾸고 다시 1910년 총독부 의원 부속 의학 강습소로 강등·개편하여 총독부 의원과 자혜 병원에서 일할 의료 요원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교육 기관은 당시 식민지 지배를 강고히 할 의료 사업, 산업 개발 정책 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총독부의 직접 관할을 받았다.

그 후 일제는 1916년부터 이들 교육 기관을 정비하여 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경성 전수학교가 전문학교로 승격되었으며, 총독부 부속 의학 강습소와 공업 전습소의 특별과가 경성 의학 전문학교, 경성 공업 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1918년에는 수원 농림학교가 수원 고등 농림학교로 승격되었고, 1922년에는 동양 협회 전문학교 경성 분교를 경성 고등 상업학교로 발족시켰다. 이러한 전문학교의 설립 취지는 일제가 ‘조선의 개발에 필요한 전문 교육’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전문 기능 인력을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식민지 전략의 변화에 따라 과학 기술 교육의 고급화를 꾀하던 일본 식민 정부의 정책 방향과는 별도로 한일 병합을 전후해서 조선인들의 고등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높아져 전문학교와 대학 등의 설립 운동이 추진되었다. 또 고급 기술 교육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상당수 일본 또는 구미로 유학을 떠났다. 평양 숭실 학교에서는 조선 최초의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국채 보상 운동이 병합으로 인해 좌절되자 마련된 기금으로 민립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보성 전문학교는 보성 대학으로 승격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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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전문학교 건물
보성 전문학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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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설립과 외국 유학을 통해서 나타난 고등 과학 기술 교육에 대한 조선인들의 열의가 자주적인 민족의식의 고취로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 제국은 조선인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억제하는 한편, 유학을 막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일본의 식민 당국은 조선인이나 선교사들의 대학 설립 인가를 불허하는 등 고급 과학 기술 교육에 대한 기회를 거의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고등 교육에 대한 조선인의 욕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차단했다. 차단의 방식은 주로 내실 없는 과학 기술 교육 관련 기관의 승격 개편을 꾀하는 것이었다.

우선 총독부 산하 교육 부서는 “조선인 자제에 대한 고등의 학술 기예를 수득하는 길이 열렸다.”고 선전하면서 법학·의학·공업·농업·상업 분야에 설립된 이전의 강습소와 전습소 등을 개편하여 관립 전문학교 설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런 개편은 실제로 조선인에게 전문 교육을 실시한다는 문구와는 달리 ‘내선인 공학(內鮮人共學)’의 명분 아래 편파적으로 일본인을 우선적으로 입학시키는 일본인 중심의 전문 교육을 실시하였다.

외국의 비판적인 시선을 의식한 총독부는, 일본인 중심의 편파적인 교육 기관 운영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을 누그러뜨림과 동시에 고급 과학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조선인의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고자 1915년에 지금의 기술 전문대학 수준에 해당하는 경성 공업 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와 함께 외국인 선교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연희 전문학교의 설립을 인가해 주기도 했다.

연희 전문은 비록 수리과라는 이공계 학과를 개설하긴 했으나, 일본 식민 정부가 마련한 까다로운 사립학교 규정에 묶여 졸업생을 상당 기간 배출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연희 전문 수리과는 1920년대 중반부터 점차 제자리를 잡아가게 되어 조선에서 거의 유일한 고급 과학 기술 교육 기관이 되었다. 국내에서 물리학과 천문학·수학 교육을 받고 미국 유학을 떠났던 몇몇 학자는 대부분 연희 전문 수리과를 졸업한 이들이었다.

경성 공업 전문학교의 설립 인가는 당시 조선의 경제와 교육 상황에 비추어볼 때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당시 조선의 공업 생산액은 농업 총생산액의 15.7%에 불과했고, 공업 교육에 대한 일제의 관심과 투자가 농업이나 상업 분야에 비해 훨씬 미미한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원 고등 농림학교(1918)나 경성 고등 상업학교(1922)보다 경성 고등 공업학교가 먼저 설립되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조선에서의 공업 교육의 필요성이 점차 뚜렷이 인식되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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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공업 전문학교 전경
경성 공업 전문학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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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조선의 경제는 일시적인 활황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에 따라 총독부는 조선 광업령(1915), 제철업 장려법(1917)을 제정하고 지질 조사소(1918)를 설치하는 등 지하자원 개발과 공업 원료 확보에 박차를 가했다. 이것은 본토의 중화학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원료 공급지로서의 조선의 역할이 커졌음을 뜻한다. 이에 따라 공업 전습소 졸 업생의 역할이 강조되었고, 나아가 기존보다 수준 높은 공업 기술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열리게 되었다. 우선 1915년에 경성 공업 전습소 특별과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3월 15일에 반포된 ‘조선 총독부 공업 전습소 특별과 규정’에 의거해 일본인을 포함한 20여 명의 입학생을 선발해 수업을 시작하였다. 교과 과정도 기계 공학·전기 공학·응용 화학·광물학 등의 전공과목이 크게 보강되었고, 실습 시간은 20여 시간에서 12시간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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