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3. 일제 강점기의 과학 기술 교육
  • 일제 식민지 과학 기술 교육의 실상
김근배

경성 공업 전문학교를 설립할 당시의 식민지 조선 경제의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서 조선은 점차 산업화·공업화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과학 기술 전문 인력의 수요도 함께 증가했고 이런 수요 증가를 보여 주는 예가 바로 경성 공업 전문학교의 설립이다. 그러나 경성 공업 전문학교로 대표되는 과학 또는 공업 기술 교육의 성장이 조선의 자주적인 공업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학교의 설립은 단지 일본 공업계의 변화에 따른 공업 원료 개발이 시급해지면서 취해진 조치로, 이는 일본 제국의 식민 경영 전략의 변화에서 직접적으로 연유한다.

또한 다른 전문학교와 마찬가지로 이 학교의 설립에도 일제가 형식적으로 조선에서 전문 교육을 실시한다는 대의명분을 확보하고,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소수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즉 식민지 통치를 원활히 해 나가기 위한 목적이 주요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경성 고등 공업학교는 전문학교의 외양만 갖추었을 뿐 내실을 기할 수 없었으며, 그나마 조선인 학생은 중도에 대거 탈락되어 실질적으로는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되는 학교가 되었다.

설립 당시 일람을 보면 전체 학생 정원은 150명이었고, 일본인 학생이 정원의 3분의 1을 넘지 않도록 하는 규정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규정일 뿐이었고, 실제 운영에서는 오히려 조선인 학생의 입학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이런 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경성 공업 전문학교는 입학 정원 수에서 일본인이 다수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은 취업률이 높지 않은 학과에 배정하는 등 편파적으로 운영되었다. 그 후 본토인과 식민인의 입학 비율 제한 규정은 아예 일람에서조차 삭제되었고, 조선인 입학생 비율이 3분의 1로 유지되는 것이 마치 불문율처럼 지켜졌다. 총독부의 내부적인 고등 교육 방침에 소위 ‘입학 비율 내규’라는 원칙은 경성 공업 전문학교의 이런 파행적·편파적인 운영을 뒷받침해 주었다.

시설 면에서도 전문학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경성 공업 전문학교가 조선인에 대한 배타적인 차별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허울뿐이었음은 시설 면에서도 금방 드러난다. 설립할 때 모든 건물과 설비를 중앙 시험소와 공업 전습소의 시설로 충당하였고, 실험실과 실습장의 설비마저도 중앙 시험소와 공업 전습소 등 세 기관이 함께 써야만 했다. 세 기관이 함께 쓰는 터라 학생들의 실험 실습 수업에 막대한 지장을 줄 만큼 각종 실험 도구나 기계 설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열악한 교육 환경은 교수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교수진은 거의 중앙 시험소 기사나 기수, 공업 전습소 교사 출신으로 구성되어 고급 기술 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진용이 결코 아니었다. 경성 공업 전습소의 특별과가 경성 공업 전문학교로 승격 설립될 때 새로 임용된 교직원은 불과 교수 한 명과 조교수 서너 명, 서기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 교수진의 학력도 박사는 일본인 한 명, 학사는 공학사 세 명, 이학사 세 명, 농학사 한 명과 학사 학위 여부를 알 수 없는 기사급 교수가 두 명으로, 일본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교수와 조교수는 전체 32명 중 열 명으로 3분의 1도 못되는 상황이었다.

이상에서 보면 일제는 학과·학생 선발·교수진·시설·예산 등의 모든 면에서 최소한의 투자만으로 경성 고등 공업학교를 설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학교는 조선에서 공업에 관한 전문적인 과학 기술 교육을 실시하는 고등 교육 기관으로 설립되었지만, 실제로는 공업 전습소의 특별과를 확대한 정도였을 뿐, 고등 교육 기관으로는 전근대적인 모습을 탈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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