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3. 일제 강점기의 과학 기술 교육
  • 고등 과학 기술 교육을 받기 위한 조선인 스스로의 노력
김근배 박진희

과학 기술 분야에서 진행된 조선인에 대한 차별화 교육 정책은 학제를 차별화하는 과정을 통해 관철되었다. 조선인이 고등 교육을 받아서 과학 기술 분야에 진출하려면 민족적인 차원에서 특별한 계기를 마련해야만 했다. 이런 거국적인 차원에서의 계기는 3·1 운동을 통해서 마련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인은 일제 식민 지배에 집단적인 대응과 저항을 수행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몇몇 개인이나 소규모의 집단은 식민지 과학 기술 전문 인력 양성 체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면서 상황을 바꾸려는 노력을 여러 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3·1 운동에 참여했던 경성 공전 졸업생과 사회 명사가 주축을 이루어 ‘공우 구락부(工友俱樂部)’를 설립, 공업 진흥 운동을 도모하였다. 클럽의 대표적인 일원이었던 김용관(金容瓘)은 1922년에 발명학회를 설립하여 1930년대 과학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같은 해 말에는 최초의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이 모국 방문 비행을 실현하여, 근대 과학 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일본의 공업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들은 고려 공업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조선인 기업, 자주적인 조선인 단체, 신문사 등의 지원을 받으며 전국 순회 과학 강연을 벌였다. 이런 근대 과학 기술의 대중 홍보가 기폭제가 되어 이후 과학 발명 보급회와 학생 과학 연구회 같은 단체도 생겼고, 이들 모두는 과학 출판과 강연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한편 조선인들은 그동안 제한받았거나 아예 받지 못하던 중·고등 교육의 수혜 기회를 확대하려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22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1차로 법과·문과·경제과·이과를 세우고, 2차로 공과를, 마지막으로 농과와 의과를 세워 민립 종합 대학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하지만 민립 대학 설립 계획은 ‘조선 땅에서의 고등 교육 불필요론’을 정책의 근간으로 견지하던 일본 식민 당국의 비협조와 방해에 부딪쳐 실현되지 못했다.

이런 민족 자주적인 움직임에 놀란 일본 식민 정부는 1923년 말경에 이르러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여 민족 자주적인 민립 대학의 추진을 흡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대학인 경성 제국 대학에는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개설하였을 뿐, 조선인이 요구한 농학·공학·이학 분야의 교육은 포함하지 않았다. 1941년에 가서야 이 대학에 이공학부가 개설되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조선인이 과학 기술 분야의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는 유학을 통하지 않고서는 전혀 얻을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고등 과학 기술에 대한 조선인의 열정이 식민지 땅에서 충족되지 못하고 유학이라는 통로로 분출되고, 1920년 후반기에 이르러 조선인 유학생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자 일제는 문화 통치기에 한동안 취했던 조선인 유학 규제와 유학생 차별 완화 정책을 버리고 다시 강압적인 제한 조치를 강화하는 반동 정책을 펴나갔다. 우선 일시적이나마 조선인에게도 적용하던 일본 내 관립 대학에 대한 외국인 특별 입학 규정도 1929년부터는 조선이 외국이 아닌 식민지라는 이유로 적용하지 않았다. 이 외국인 특례 입학 규정을 적용받지 못하게 된 후부터는 대부분의 일본 관립 대학 이공계 학과에 조선인의 진학이 더욱 힘들었다. 게다가 이들 관립 이공계 대학은 주간 과정으로만 운영되어서 고학하던 상당수 조선인은 진학의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중에서 이공계 전공자 비율은 5% 정도에 지나지 않을 만큼 낮았다. 게다가 관비 유학생 선발도 1930년부터 아예 중단하여, 1934년에는 폐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일제 강점기 동안에 2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순전히 개인적 노력이나 주위의 후원과 격려에 힘입어 일본의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식민 당국이 이렇게 제한 조치들을 강화한 이유는 유학생의 급격한 증가가 궁극적으로 식민 지배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비슷한 조치는 이미 1907년에 발표한 유학생 규정에 있었다. 유학생에 대한 두 번의 규제 조치는 일본의 식민 정책의 기본 틀인 민족의식 말살 전략이 일관되게 지속되었고, 고등 교육 불필요론이 끝까지 정책적으로 견지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근대 과학 기술을 배우려는 조선인들의 열망은 유학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립계 공업학교의 설립 추진에서도 곧바로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에서 국제 정치학과 법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김려식(金麗植)이 민족적인 전통이 강한 협성(協成) 학교를 인수 개편하여 설립한 협성 실업학교를 들 수 있다. 협성 실업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사람이 설립한 최초의 정식 공업학교였다. 사실 조선인이 사립 공업학교를 세우고 운영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식민 당국의 엄격한 사립학교 규정을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비도 일반 학교보다 최소한 네 배 이상 마련해야 하는 제한적인 규정들이 불문율처럼 지켜졌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이후 조선인들에게 널리 재정 지원을 받아 1930년대 중반부터는 여러 공업학과를 갖춘 갑종 공업학교로의 승격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설립자 김려식과 교원 여러 명이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학교를 떠나는 바람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이내 문을 닫아야만 했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과학 기술계에 진출하는 조선인들이 한층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1935년부터 본격화한 교육 운동은 조선인이 주체가 되어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자력으로 교육의 확대와 증진을 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여 많은 사람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교육 운동 초기에는 일제의 고등 교육 억제 정책으로 심각하게 부족했던 인문계 중등학교 설립을 주로 모색했는데, 1935년 무렵부터는 전국적으로 전개된 과학 운동으로 과학 기술 발전의 필요성과 시급성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되면서 고등 실업학교 설립 추진이 급속하게 전개되었다. 게다가 중일 전쟁의 시작으로 기술 인력 수요가 늘어나면서 총독부가 공업학교를 공립으로 세울 경우 설립 요건을 다소 완화해 허가한 것도 공업학교 설립 운동이 활성화하는 데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주요 대도시를 시작으로 갑종 공업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가장 먼저 경성 공립 공업학교가 1938년에 세워졌고, 이듬해에는 평양 공립 공업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어 1940년에는 이리 공업학교, 흥남 공업학교, 부산 공업학교, 사립으로는 조선 전기 공업학교 등 한꺼번에 네 개가 설립되었다.

공업학교 설립이 이 무렵에 급증한 것은 중일 전쟁에 따른 제반 산업의 확장과 기술 인력 진출이 늘어난 데서 비롯했다. 특히 기술 인력 수요는 모든 지역, 모든 분야에서 급증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보다는 외지 수당이 훨씬 더 많은 중국이나 만주의 파견 근무를 더 원했다.

총독부는 이전처럼 기술 인력을 일본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조선에 필요한 인력 수요를 도저히 충당할 수 없으리라 판단하였다. 따라서 1936년 후반부터는 공업계 학교의 증설을 모색하였다.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던 총독부는 공업학교 설립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일을 추진하지 못하다가 조선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일을 성사시켰다. 공업학교 설립에 드는 재원은 총독부가 일부 보조하기도 하고 민간 기부금과 채권으로 마련되 었다. 이로써 1943년까지 열 개 가까운 공립 공업학교가 기계과·전기과·광산과 위주로 세워져 갑종 수준의 교육을 이수한 조선인 인력을 1200여 명이나 배출하였다. 이 수효는 이전까지 일제가 설립하여 운영해 오던 공업학교들이 배출한 조선인 졸업생 총수보다도 훨씬 많은 숫자로, 일제의 식민지 과학 기술 교육이 조선인의 뜨거운 교육 열정을 막아 왔다는 좋은 정황적 증거가 된다.

이런 교육 운동에 대항하여, 일본은 우선 경성 공업 전문학교를 고등 공업학교로 개칭하면서 일본의 고등 공업학교에 준하는 제도상의 틀을 갖추게 한다. 이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 교육을 완화한다는 것을 제도적으로 가시화하고자 했을 뿐, 실질적인 교육 내용의 질적 상승을 도모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변화가 있었다면 조선인 입학생이 증가했다는 것인데, 이들의 공학 학사증을 인정해 주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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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경성 제국 대학교
1930년대의 경성 제국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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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은 민립 대학 설립을 저지하고자 1922년 개정 조선 교육령을 선포하여 대학 설치를 법제화하고 관립 대학을 직접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1926년 서울에 종합 관립 대학교로 경성 제국 대학의 법학부와 의학부가 문을 열게 된다. 이어 1938년에 이학부가 개설되지만, 이학부 개 설은 조선인의 고등 교육 강화가 아니라 대륙 병참 기지 마련에 필요한 기술자 교육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이 이학부에 조선인들이 들어가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다. 개설 당시 이학부에 등록한 조선인 학생은 14명이었고, 1943년에도 36명에 불과했던 반면에 일본인 학생은 95명에 이르고 있었다.

결국 일제의 과학 기술 교육 정책의 변화는 교육의 답보 상태를 타개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3·1 운동 후 격화된 반일 감정을 무마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대륙 진출과 대동아 공영(大東亞共榮)의 전초 기지로서의 조선에서 과학 기술 전문 인력의 수급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식민 경영 전략에서 나온 정치적 미봉책일 뿐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일제의 식민 지배 체제는 조선에서 과학 기술의 진정한 발전과 고급 인력의 성장을 의도적으로 끊임없이 저해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과학 기술 인력은 일제의 조선인 하층화 전략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성장한 고급 과학 기술자의 수는 매우 적었고,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기는 더욱 어려웠다. 대부분의 과학 기술 인력은 기능공 정도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이 같은 문제점과 한계는 우리나라가 식민 지배의 상황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광복으로 새롭게 마련된 독립 국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으로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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