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4. 조선 지식인의 과학 기술 읽기
  • 이항로, 단견 혹은 혜안?
김태호

조선 말기에 세계 구석구석까지 손길을 뻗쳐 가던 제국주의 세력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막강한 힘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힘의 원천이 서학(西學), 그 중에서도 서양의 과학 기술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조선이 나아갈 바는 무엇인가? 조선도 서학을 익혀 그들과 같은 힘을 얻어야 하는가? 서학을 익혀야 한다면 서교(西敎), 즉 그리스도교도 허용할 것인가? 나아가 서학과 서교는 떼어 생각할 수 있는가? 이런 골치 아픈 질문은 이른바 개화파만의 과제는 아니었다. 조선 말 보수주의의 거두 이항로(李恒老)는 1866년 병인양요를 맞아 올린 상소문에서, ‘양물(洋物)은 기이한 재주와 음탕한 교묘함’에 다름 아니라고 규정하였다. 뿌리(本)와 가지(末)라는 성리학적인 구도에서 보았을 때, 서양의 과학 기술이 제 아무리 정교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성현의 가르침을 잊고 본질에서 벗어난 말류(末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벽사록변(闢邪錄辨)』에서, 다음과 같은 관점을 바탕으로 서교는 물론 서학 전체를 비판하였다.

여러 장인의 기예가 뒤에 나온 것이 더욱 정교하지만, 그렇다고 앞사람이 우매하고 뒷사람이 지혜롭다거나 앞사람이 서투르고 뒷사람이 더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음식이란 주림을 채우고 생명을 키우는 것이 근본이며, 볶음요리와 곰발바닥은 말단이지만 오히려 그 근본을 해치는 것과 같다. 예컨대 집이란 비바람을 피하는 것이 근본이고, 옥으로 치장한 궁궐과 돈대(瓊宮瑤臺)는 말단이지만 오히려 그 근본을 해치는 것과 같다.

18세기까지 조선의 유학자들이 서교, 즉 천주교는 강렬히 비판하면서도 서학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에 비해 이항로는 서 학도 서교 못지않게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서양 천문학에서 가르치는 지구설(地球說)은 ‘중화와 오랑캐〔華夷〕’라는 전통적인 구분을 부정하기 때문에 전통 세계 질서를 교란하는 위험한 사상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항로의 서양 과학 비판은 서구 과학 기술의 아주 일부분에 대하여 그것도 매우 부정확한 정보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항로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주로 서양의 천문학과 우주론이었다. 또 그가 알고 있는 서양 과학이란 사실 17세기에 서학을 비판하기 위해 청나라 사람이 쓴 책에 실린 단편적인 내용들이 전부였다. 그가 글을 쓰던 19세기 중반의 서양 천문학은 17세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으니, 이항로는 이미 사라진 과학 이론을 열심히 비판하고 있었던 셈이다.

서양의 과학 기술 안에는 그것이 나고 자란 서양의 문화와 가치관이 녹아들어 있다는 것, 따라서 서양의 과학 기술이 보여 주는 힘에 홀려 그것을 맹목적으로 좇는 이는 결국 전통 문화를 저버리고 말리라는 것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서양 과학 기술과 조선의 전통 문화가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이항로를 비롯한 보수주의자와 개화파의 생각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다만 둘의 차이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개의 가치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물리칠 것인가의 차이였을 뿐이다. 서양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의도는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과학 기술이 첨병이 되리라는 것도 내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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