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4. 조선 지식인의 과학 기술 읽기
  • 우승열패라는 새 계명
김태호

1910년, 조선인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나라를 빼앗긴 충격은 조선인들에게 “왜, 어떻게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나라를 다시 찾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를 던져 주었다. 전통적 가치의 무기력함에 실망한 많은 지식인은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서구 근대 문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곧 ‘과학’이 서구 근대 문명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과학 지식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신문·잡지 등에 많은 글을 썼다.

이들이 대중에게 소개했던 과학의 내용 가운데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과학 지식’이라기보다 ‘과학 지식의 사회적 의미’라든지 ‘과학 사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퍼졌던 것은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 또는 이른바 ‘사회 진화론’이었다. 사회 진화론은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생물 진화의 원리가 인간 사회에도 적용된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사회사상으로, 19세기 후반 스펜서(Herbert Spencer) 등이 주장하여 유럽과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사회 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시켰다 하여 큰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엄밀히 따져 보면 진화론을 왜곡한 부분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적자생존이라는 가치중립적 원리를 ‘우수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식으로 오해함으로써 많은 문제의 소지를 안았다. 다윈이 얼룩나방(Peppered Moth)의 예로써 잘 보여 주었듯, ‘적자(適者)’란 단지 그때그때의 환경에 따라 가장 살아남기 유리한 개체를 말할 뿐, 더 우수한 개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검은색 얼룩나방이 늘어나게 된 것은 나무가 공장의 매연으로 오염되어 우연히 검은 나방이 숨기 좋 은 환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지, 검은 나방이 흰 나방보다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 진화론에서는 환경 적응의 문제가 어느새 우열(優劣)의 문제로 바뀌었고, 적자생존은 ‘우승열패(優勝劣敗)’와 같은 뜻인 양 받아들여졌다. 더욱이 당시 서구 사회를 풍미했던 인종주의와 결합되면서 우승열패는 개인의 생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민족 또는 국가의 흥망에 관한 법칙으로 믿어졌다.

일찍이 미 대륙에 건너간 백인들이 원주민을 몰살시키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부린 것이며, 19세기 후반 유럽의 나라들이 다른 지역의 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것 따위가 모두 우승열패 또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과학적 법칙’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스스로를 ‘우자(優者)’ 또는 ‘강자(强者)’라고 여기는 서양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느 틈에 ‘열자(劣者)’와 ‘약자(弱者)’가 되어 버린 동아시아의 지식인들도 사회 진화론을 그들의 앞길을 비춰 줄 과학적 진리로 여겼다. 사회 진화론은 분명 이들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달갑지 않은 이론이었다. 하지만 동서양의 힘의 차이가 너무도 뚜렷이 드러난 상황에서 우승열패는 냉엄한 현실로만 여겨졌고, 열패당하는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는 중요한 과제였다.

진화론과 사회 진화론이 가장 먼저 소개된 일본에서는 이른바 ‘내지잡거(內地雜居) 논쟁’이라 하여 내지, 즉 일본 땅에서 일본인과 이방인이 함께 뒤섞여 사는 것이 일본 민족의 장래를 위해 좋은 일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또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같은 이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유기체와 세포의 관계와 같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회 진화론이 천황제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쓰이는 터전을 닦았다.

중국에서는 옌푸(嚴復)와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사회 진화론을 소개했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루쉰(魯迅)과 같은 지식인들은 사회 진화론을 빌려 “(중국 민중이 노예근성을 버리지 않으면) 머지않아 자연 도태되어 하루 하루 퇴화하여 원숭이·새·조개·바닷말을 거쳐 결국에는 무생물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라며 중국 민중의 경각심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와 같은 ‘퇴화론(退化論)’은 과학적으로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었지만, 중국 지식인들의 위기감과 맞물려 널리 유포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 말 옌푸의 『천연론(天演論)』과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등이 소개되었고, 국권 상실의 위기를 맞아 사회 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사회 진화론은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거든 힘을 길러 경쟁에서 승리하고, 약자의 살로 배를 불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냉혹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탐욕을 탓하기에 앞서 우선 조선의 약함을 한탄하였고, 약하고 열등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리하여 사회 진화론은 일제 강점기 초반에 벌어진 계몽 운동과 국권 회복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의 교가, 계몽을 부르짖는 신문의 논설과 명사들의 연설 등에서 우승열패니 약육강식이니 자강(自强)이니 하는 글귀들은 늘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1907년 발표된 서우(西友) 사범학교의 「학도가」의 가사는 이와 같은 현실 인식을 잘 보여 준다.

생존 경쟁 당차 시대에

국가 흥망이 니게 달녓네

열강의 대우, 생각사록

노예 희생의 치욕일세

이천만 동포 우리 형제아

此時(차시)가 何時(하시)며 此日(차일) 何日(하일)고

육대주 대륙의 형편 살피니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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