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4. 조선 지식인의 과학 기술 읽기
  • 발명학회와 과학 데이
김태호

그러나 모든 지식인이 현실의 벽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은 아니다. 한반도에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과학 기술이 서양이나 일본에 비길 데 없이 초라한 것일지라도, 그 초라한 과학 기술로도 뭔가 뜻있는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 1930년대가 되면 경성 공업 전문학교(京城工業專門學校)와 연희(延禧) 전문학교 등에서 초급 대학 수준의 과학 기술 교육을 받은 이들이 사회의 이곳저곳으로 진출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은 과학 기술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으므로, 대중에게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알리고 과학 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실질적인 운동을 벌여 나갈 수 있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김용관(金容瓘, 1897∼1967)이 주도한 ‘과학 운동’이었다. 김용관은 경성 공전과 일본 도쿄의 고등 공업학교 요업과를 거쳐 1919년 무렵부터 요업 관련 기관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사설 강습소인 조선 공예 학원을 경영하던 중 박길룡(朴吉龍)·현득영(玄得榮) 등 공업 전습소와 경성 공전 출신의 과학 기술자들과 함께 1924년에 ‘발명학회(發明學會)’를 조직하였다. 학회가 표방한 목적은 ‘회원을 대상으로 공업 지식을 보급하고 발명적 정신을 향상’ 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발명 특허 수속에 필요한 상담, 발명품의 설계, 원료의 감정 등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발명 컨설팅 회사와 같은 일을 하고자 하였다. 이는 당시 진행 중이던 물산 장려 운동에 발맞추어 조선인이 소유한 중소기업의 제품 개발과 경영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발명학회의 또 다른 중요한 사업은 ‘발명적 정신을 향상’ 하겠다는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과학 지식 보급을 통한 일반 대중의 계몽 운동이었다. 김용관 등은 이를 위해 과학 기술자뿐 아니라 당대의 명사들을 영입하여 의욕적인 과학 대중화 운동을 벌였다. 발명학회는 1933년에는 잡지 『과학 조 선(科學朝鮮)』을 창간하고, 이듬해에는 ‘과학 데이’ 행사를 주최하였다. 과학 데이는 진화론의 주창자로 당시 우리나라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기일인 4월 19일로 정해졌다.

1934년 4월 19일의 첫 번째 과학 데이에는 라디오 방송·강연회·좌담회·활동사진 상영·공장 견학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이를 계기로 윤치호·이인·송진우·방응모·김성수·이종린·최규동·조동식·현상윤·이하윤·윤일선 등 당대의 조선인 명사가 모두 이름을 올린 과학 지식 보급회(科學知識普及會)가 조직되었다.

1935년에는 이들의 도움 아래 성대한 두 번째 과학 데이 행사가 열렸다. 여러 신문사에서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라는 등의 표어를 싣고 포스터까지 만들어 주면서 홍보를 도왔고, 4월 19일 밤의 기념식에서는 여운형(呂運亨) 등 명사의 강연이 이어졌으며 김억(金億)이 작사하고 홍난파(洪蘭坡)가 작곡한 ‘과학의 노래’가 연주되었다.

1절

  새 못되야 저 하늘 날지 못노라

  그 옛날에 우리는 탄식했으나

  프로페라 요란히 도는 오늘날

  우리들은 맘대로 하늘을 나네

후렴

  과학 과학 네 힘의 높고 큼이여

  간데마다 진리를 캐고야 마네

2절

  적은 몸에 공간은 넘우도 널고

  이 목숨에 시간은 끗없다하나

  동서남북 상하를 전파가 돌며

  새 기별을 낫낫이 알려주거니

3절

  두다리라 부시라 헛된 미신을

  이날 와서 그 뉘가 미들 것이랴

   아름답은 과학의 새론 탐구에

  볼지어다 세계는 밝아지거니

많은 지식인이 관념적으로 과학의 필요성만을 되뇌고 있을 적에 이들이 이룬 일은 의의가 크다. 당시 낙후된 조선의 과학 수준에도 불구하고 발명학회가 조직되고 과학 데이 행사가 열릴 수 있었던 데에는 김용관 등이 제시한 발명이라는 개념의 공이 컸다. 식민 권력이 고등 교육에서 조선인을 차별하는 현실에서 과학이나 기술로 조선이 일본을 따라잡는 일은 아득했다. 그러나 실용적인 발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조선 사람들도 관찰력과 창의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좋은 발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 조선』 1935년 3월호에 실린 김용관의 ‘발명가의 필요 사항 몇 가지’라는 기사에서 왜 그가 ‘과학학회’가 아닌 ‘발명학회’를 만들었는지 잘 나타난다.

사물의 이치를 알어야 한다고 …… ‘그것을 다 알 필요는 없고’ 다만 그들 ‘사물’의 원칙이나 원리를 알고 있으면 조타. 가령 ‘에네르기’의 불변이란 것을 알고 잇스면 적은 힘으로써 큰 힘을 일으키려고 하는 등의 생각은 불가능임을 아는 것과 가티 사물의 원칙을 알고서 냉정히 생각하는 때는 불가능성을 발견하기도 그다지 어려웁지 않을 것이다.

당시의 발명에 대한 기대감은 1930년대의 신문 등에서 적잖이 발견된다. 『동아일보』는 1936년 1월 1일자에서 ‘발명 조선(發明朝鮮)의 귀중한 수확’이라는 제목 아래 당시 발명계의 동향을 소개하고 있다. 1933∼1934년의 발명 특허와 실용신안이 17건에 불과했던 것이 1935년 한 해에만 80건을 넘어서 ‘우리도 발명에 힘을 써야겠다는 것을 말하야 준 것.’이라며, 일제 강점 이래 특허국에 등록된 조선 사람의 특허가 486건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당대의 저명한 발명가들의 사진을 싣고 서양과 일본 등 선진국의 발명 장려 제도를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발명 의욕을 높이고자 하였다.

본격적인 과학 기술 고등 교육이 이루어질 기약이 없는 상황에서, 발명은 우회적인 과학 기술 진흥의 방편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한편 ‘혁혁(赫赫)한 선인 유업(先人遺業)에 천재적(天才的) 창안(創案)’이라는 부제가 보여 주듯이, 이 기사에서는 세계 최초(最初)의 발명인 귀갑선(龜甲船)과 목활자(木活字), 세종 대왕 창의(創意)의 세계 최초 측우기(測雨器), 정평구(鄭平九)의 비거(飛車), 그리고 고려청자와 첨성대 등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원래 창의력이 뛰어난 민족’이라는 최남선의 이른바 ‘천재 민족론’을 상기시키고 있다. 맨주먹뿐인 발명가들의 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우리 민족의 창의성’이라는 막연한 믿음에라도 기대야 했던 당시의 절박한 처지를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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