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
  • 1. 미완성에 그친 과학 기술의 재건
  • 광복 직후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계
김근배

일제 강점기에 과학 기술을 대학 학부 수준 이상으로 공부한 사람의 수는 4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제가 조선인 과학 기술자의 배출을 억제 했기 때문에 외국에서 과학 기술을 공부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200여 명은 일본 대학에서, 100여 명은 미국 대학에서, 30여 명은 일본이 만주에 세운 대학에서, 또 다른 30여 명은 유럽 대학에서, 나머지 20여 명은 중국이나 소련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공계 박사 학위를 소지한 사람의 수는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광복 직후에 과학 기술을 담당하는 기관으로는 중앙 공업 연구소·지질 광산 연구소·중앙 관상대 등이 있었다. 중앙 공업 연구소(초대 소장 안동혁)는 광복 이후 6·25 전쟁까지 과학 기술에 관한 조사 연구를 주도한 기관이다. 약 150명의 직원이 근무하였고, 연구 분야는 무기 화학·유기 화학·요업·염직공예·기계공작·식품 등의 여섯 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연구소는 과학 기술에 대한 조사 연구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의 지도와 보급, 과학 기술자 및 교사의 양성 등을 추진하였다.

지질 광산 연구소(초대 소장 박동길)는 60여 명이 근무했으며, 비교적 우수한 도서실과 표본실을 갖추고 있었다. 이 연구소는 미국 지질 전문가단과 함께 전국의 주요 광물 자원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했으며, 대한 지질학회와 함께 100만분의 1 수준의 한국 지질도를 발간하기도 했다. 중앙 관상대(초대 대장 이원철)는 연구소는 아니었지만 기상 기술원 양성소를 설립하여 인력을 충당하였다. 특히 미군정은 한국의 인근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미 공군에게 기상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기상 관측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

광복과 함께 과학 기술계에서도 새로운 정부의 수립에 필요한 학술 활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발족된 조선 학술원은 학술계의 모든 부문을 포괄한 단체로서 과학 기술 관련 부서로 이학부·공학부·기술 총본부 등을 운영하였다. 과학 기술계를 포괄하는 단체로는 공업 기술자들이 주축이 된 조선 공업 기술 연맹과 과학자 및 공학자가 중심이 된 조선 과학 기술 연맹이 결성되었다. 각 학문 분야를 대표하는 과학 기술 단체도 잇 따라 설립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조선 수물학회·조선 화학회·조선 생물학회·조선 토목 기술 협회·조선 건축 기술 협회·조선 전기 기술 협회·조선 화학 기술 협회·조선 기계 기술 협회 등이 있다.

이러한 과학 기술 단체가 광복 직후에 형성된 정치적 공간 속에서 안정된 활동을 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정당 및 정치 단체들은 정치적 사안마다 지지할 것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정치적 활동에도 적극 동참할 것을 강요하였다. 당시의 과학 기술자들은 대부분 뚜렷한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정치 활동에 대한 참여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이념의 대립이 뛰어넘을 수 없는 시대적 상황으로 다가오면서 과학 기술 단체 내에서도 구성원들 사이의 이념적 갈등이 점차 표면화되었다. 과학 기술보다는 다른 정치적 사안이 주된 논의의 대상이 되었고, 이에 따라 광복 직후 우리나라 과학 기술자 사회는 자신의 역할을 정하지 못한 채 표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의 과학 기술자들이 과학 기술에 대해 가졌던 견해는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몇몇 과학 기술자는 상아탑(象牙塔) 속에 안주하거나,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과학 기술 연구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실생활과 직결되고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는 방향으로 과학 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과학 기술자들은 이념적 성향이 뚜렷한 정치적 활동을 배척하면서, 국가의 발전과 지식의 진보를 위해 과학 기술 연구에 전념할 것을 주장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대부분의 과학 기술자들은 과학 기술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다만 자신이 처한 여건 속에서 나름대로 과학 기술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과학 기술자들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과학 잡지를 발간하는 데 열성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주요 과학 잡지로는 『대중 과학』, 『현대 과학』, 『과학 세기』, 『과학 나라』, 『과학과 발명』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과학 잡지들은 과학 기술에 대한 관심을 고취하거나 과학 정신을 대중적으로 확산 하는 등 과학 기술을 통해 일반인을 계몽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과학 기술의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과학 기술을 알기 쉽게 소개하는 글이 많았다. 그 밖에 과학 기술자의 전기와 과학 기술의 역사를 소개하거나 과학 기술 정책을 제안하는 글이 일부 있었다.

광복 당시에 국내에서 운영되고 있던 이공계 고등 교육 기관은 다섯 개뿐이었다. 경성 대학 이공학부, 경성 공업 전문학교, 경성 광산 전문학교, 대동 공업 전문학교, 연희 전문학교 수리과가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946년 7월에 국립 서울 대학교 개편안(일명 국대안)에 따라 서울 대학교에 공과 대학과 이학부가 설치되면서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이학(理學)의 경우에는 서울 대학교에 이어 연희 대학교와 단국 대학교가 이학부를 설치하였고, 1950년대 말이 되면 거의 모든 종합대학교가 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지질학 등을 포괄하는 이학부를 운영하게 되었다. 공학(工學)의 경우에는 서울 대학교 공과 대학에 이어 1948년에는 토목·건축·전기·기계의 네 개 과로 한양 공과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1950년에는 연희 대학교가 전기 공학과를 추가하여 이공 대학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고등 교육 기관을 개편하는 작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울 대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에서도 ‘국대안(國大案) 파동’이라 불릴 정도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국대안은 대학 교육의 효율성을 제고한다는 명목 속에 한국의 대학 체제를 일본식에서 미국식으로 전환하기 위해 구상되었다.

그것은 경성 대학을 중심으로 경성 공업 전문학교·경성 광산 전문학교·경성 의학 전문학교·경성 치과 의학 전문학교·수원 고등 농림학교 등 아홉 개 전문학교를 통합해 하나의 종합적인 대학교를 만드는 방안이었다. 국립 서울 대학교 내에 문리과 대학·공과 대학·의과 대학·치과 대학·농과 대학 등 아홉 개의 단과 대학과 대학원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국대안은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당시의 과학 기술계는 국대안 이 이공계 고등 교육 기관을 축소하는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공계 고등 교육 기관이 매우 취약한 상황에서는 경성 공업 전문학교와 경성 광산 전문학교도 각각 독립된 대학으로 발전시켜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서울 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미 해군 대위인 앤스테드(Harry B. Ansted)가 임명된 것은 자신들의 손으로 대학을 만들겠다는 한국인들의 소망을 저버리는 결정이었다. 특히 대학 내의 좌익 세력은 미군정의 결정을 자신들을 대학에서 몰아내기 위한 음모로 간주하고 맹렬히 저항하였다.

서울 대학교가 설립되면서 이공학부는 문리과 대학 이학부와 공과 대학으로 나뉘어졌다. 이학부는 미국식 대학 체제를 따라 문리과 대학에 소속되었고, 공과 대학은 1학년의 교양 과목을 문리과 대학에 맡겨 이수하게 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에 다른 대학에도 널리 채용되어 상당 기간 동안 이공계 교육 체제의 모델로 작용하였다. 문리과 대학 이학부는 경성 공업 전문학교와 중앙 공업 연구소, 공과 대학은 경성 대학 이공학부와 경성 광산 전문학교의 건물과 시설을 이용해 개강했다. 미군정은 서울 대학교를 성공 사례로 만들기 위하여 고등 교육 기관에 대한 지원액에서 서울 대학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1947년에는 90.6%, 1948년에는 76.8%에 이를 정도로 집중 지원하였다.

그러나 서울 대학교의 운영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설비와 도서가 크게 미흡하고 교수진도 매우 부족하여 내실 있는 교육이나 연구가 이루어지기는 힘들었다. 전임 교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학과들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국대안 파동을 계기로 불붙은 좌우익(左右翼)의 정치적 갈등은 학내 분위기를 크게 해쳤고 많은 교수와 학생을 학교에서 떠나게 했다. 예를 들어 문리과 대학 학장을 맡고 있었던 이태규(李泰圭)는 좌익 학생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면서 1948년에 미국으로 떠났고, 비날론(vinalon)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리승기(李升基)는 북한이 자신의 발명품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자 1950년에 월북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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