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
  • 2. 과학 기술 활동의 형성과 발전
  • 정부 주도의 과학 기술 진흥
송성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과학 기술 활동이 성장하는 패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선진국에서는 과학 기술 활동이 어느 정도 정착된 상태에서 정부의 개입이 있었지만,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초창기부터 과학 기술 활동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이 정부의 지원에 의해 확보될 수 있었다. 정부의 주도로 과학 기술 활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 정책을 전담할 수 있는 국가 기구의 확립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67년에 과학기술처가 설립되었다.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될 당시에는 과학 기술과 관련된 행정 기구가 산발적으로 존재하였다. 문교부에는 과학 교육국이 있었고, 상공부에는 광무국·수산국·전기국·공업국 등이 있었다. 그러나 문교부 과학 교육국은 교육 정책에 한정된 업무를 맡았고, 상공부의 경우에는 기술보다는 주로 산업 정책과 관련된 업무를 추진하였다. 1959년에 원자력원이 설립되면서 정부의 과학 기술 활동에 대한 지원이 본격화되었지만 과학 기술 정책이 원자력원에게 공식적으로 위임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1950년대까지는 과학 기술 정책을 전담하는 행정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과학 기술 활동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62년에 부흥부(이후에 경제기획원으로 개칭) 내에 기술 관리국이 설치되면서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과학 기술의 진흥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기술관리국을 매개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부문 계획으로서 제1차 기술 진흥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고, 과학 기술의 진흥을 위한 법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 추진되었다. 이와 함께 과학 기술 예산이 독립된 항목으로 책정되었으며, 과학 기술 정책에 관한 자료와 통계도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술관리국은 정부 내에서 위상이 낮았기 때문에 과학 기술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실제적인 역할도 경제 정책의 추진에 요구되는 과학 기술 업무를 충족시키는 것에 머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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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처 개청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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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과학 기술계는 과학 기술을 전담하는 정부 부처의 설치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이미 정부 수립 당시에 몇몇 과학 기술자들이 과학 기 술을 전담하는 부처의 창설을 주장했으며, 그러한 요구는 196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특히 1966년에는 과학 기술과 관련된 단체와 학회를 망라한 한국 과학 기술 단체 총연합회가 결성됨에 따라 과학 기술 전담 부처의 설치에 대한 과학 기술계의 요구가 집중적으로 표출될 수 있었다. 마침 1967년에는 제6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학 기술 전담 부처가 설치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결국 과학 기술 전담 부처의 위상은 부(部)보다 낮은 처(處)로 결정되었고, 1967년 4월 21일에는 기존의 기술관리국과 원자력원을 모태로 과학기술처(초대 처장 김기형)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과학기술처의 설립을 전후로 1966년에는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 육성법이, 1967년에는 과학 기술 진흥법·기술사법·직업 훈련법이 제정되는 등 과학 기술과 관련된 주요 법률이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 과학 기술 진흥법은 과학 기술에 관한 종합적인 법률로서 이후에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치면서 1997년까지 존속하였다. 이어 과학기술처는 1968년에 과학 기술 개발 장기 종합 계획을 수립하여 향후 과학 기술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 계획은 과학 기술의 자주 개발 능력을 강화하여 1980년대에 우리나라가 중진 공업 국가군에서 최상위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를 위한 개발 전략으로는 선진 기술 도입의 촉진과 흡수, 과학 기술계 인력의 개발과 최대 활용, 민간 기술 개발 활동의 조성 강화, 국제 분업적이며 특성 있는 기술 개발 등이 제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과학 기술 정책이 형성되던 시기에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는 과학 기술이 전략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는 1967∼1971년에 주요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으며, 1973∼1979년에 철강·화학·비철금속·기계·조선·전자 공업 등의 6대 전략 산업을 중심으로 중화학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 정책은 이러한 전략 산업의 육성에 필요한 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데 초점이 주어졌다. 즉, 정부에서 전략 산업을 선정하면 그것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핵심 기술을 선택하고, 이에 대한 연구 개발 활동을 전개하는 패턴을 보였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달리 기존의 분야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특정 분야를 선택한 후에 이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1971년에 과학기술처는 과학 기술 정책의 기본 방향을 과학 기술 기반의 조성·강화, 산업 기술의 전략적 개발, 과학 기술 풍토의 조성으로 설정했는데, 그것은 1970년대를 통하여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여기에는 과학기술처의 2대 처장으로 1971년 6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7년 6개월 동안 재임한 최형섭(崔亨燮)의 역할이 컸다. 그는 우리나라 과학 기술 정책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은 1985∼1997년의 12년 동안 과학기술처 장관이 무려 13회나 교체된 것과 크게 대비된다.

과학 기술 기반의 조성을 위한 정책은 과학 기술 인력의 양성과 기초 과학에 대한 지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71년에는 고급 과학 기술 인력을 효과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한국 과학원(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KAIS)이 설립되었고, 1973년에는 기술 인력과 기능 인력의 원활한 공급을 촉진하기 위해 국가 기술 자격법이 제정되었다. 이어 1977년에는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요구되는 기초 과학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 과학 재단이 설립되었다. 아울러 1972년에는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종합 과학 기술 심의회가 설치되어 우리나라 과학 기술 정책을 종합적으로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산업 기술의 전략적 개발을 위해서는 기업의 기술 개발 활동을 지원하고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을 설립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972년에는 기술 개발 촉진법이 제정되어 재정·금융상의 우대 조치를 통해 기업이 기술 개발비를 적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 정부는 1973년에 특정 연구 기관 육성법을 제정하여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이 산업 기술에 대한 연구 개발을 직접 담당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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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 설립된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KIST)를 모델로 하여 1970년대에는 주요 산업별로 특화된 정부 출연 연구 기관들이 잇따라 출현하였다. 특히 정부는 1974년부터 대덕 연구 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에 착수하여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을 중심으로 대규모 연구 집단을 형성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과학 기술 풍토를 조성하기 위한 정책은 국민에게 과학 기술을 보급하고, 과학 기술 단체를 지원하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국민에게 과학 기술을 보급하는 사업은 1972년에 설립된 한국 과학 기술 진흥 재단(현재의 한국 과학 문화 재단)을 통해 추진되었다. 특히 1973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 회견에서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주창한 후에는 새마을 사업과 연계된 기술 봉사단을 조직하고 시도별로 학생 과학관을 설치하는 작업이 전개되었다. 과학 기술 단체에 대한 지원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76년을 기준으로 한국 과학 기술 단체 총연합회에는 102개의 학회와 40개의 협회가 가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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