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
  • 2. 과학 기술 활동의 형성과 발전
  •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의 출현과 성장
송성수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 활동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의 육성에서 찾을 수 있다.

1960∼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대학은 교육에, 기업은 생산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 개발에 주력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연구 기관을 설립하는 전략이 채택되었는데, 그것은 국공립 연구소가 아닌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의 형태를 띠었다. 여기에는 우수한 연구 개발 인력을 유치하는 데에 공무원과 동일한 처우를 받는 국공립 연구소가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은 다른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제도로서 우리나라 정부가 과학 기술 정책을 추진하는 주요한 매개체로 작용해 왔다.

확대보기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IST) 기공식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IST) 기공식
팝업창 닫기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은 1966년에 설립된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IST)이다. KIST가 설립되기 이전에도 종합적인 과학 기술 연구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63년 7월에는 상공부 산하의 국립 공업 연구소를 재단 법인으로 변경하여 과학 기술을 담당하는 종합적인 연구소로 육성하는 계획이 마련되었고, 1964년 9월에는 몇몇 공기업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던 금속 연료 종합 연구소를 민간 종합 연구소로 개편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해당 기관의 반발이나 재정 확보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KIST의 설립에 관한 논의는 1965년 5월 18일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 존슨(Lyndon Baines Johnson) 대통령의 제2차 정상 회담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미국이 개발 차관 1억 5000만 달러를 제공하고 한국의 산업 발전에 기여할 응용과학 연구소의 설립을 원조한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약속한 대가로 미국이 기술 원조를 제공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마련되었다. 또한 미국은 연구소의 설립을 통해 당시에 세계적 문제가 되었던 ‘두뇌 유출’ 현상에 반대되는 사례를 만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도 한미 관계를 강화함과 동시에 경제 개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방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1965년 7∼8월에는 미국 대통령의 과학 기술 특별 고문이었던 호닉(Donald F. Hornig)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파견되었고, 호닉 조사단은 연구소 신설의 필요성과 성공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한국의 연구소 설립 작업을 추진할 기관으로는 바텔 기념 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가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9∼12월에는 바텔 연구소의 전문가들이 내한하여 연구소의 설립 방식·규모·연구 분야·운영 체제 등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KIST는 바텔 기념 연구소를 본떠 정부와 산업계에서 연구를 위탁받고 그 대가로 주어진 기금으로 운영되는 ‘계약 연구 체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KIST는 1966년 2월 10일에 발족되었으며, 초대 소장으로는 원자력 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최형섭이 임명되었다.

KIST가 발족된 후에는 부지를 선정하고 연구 인력을 확보하는 작업이 전개되었다. KIST의 부지로는 홍릉(洪陵)에 있는 임업 시험장이 선정되었으나 농림부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임업 시험장도 중요하지만 KIST는 그보다 더 중요하니 터를 넘겨주라.”고 지시함으 로써 공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KIST는 우수한 연구 인력을 유치하기 위하여 국립대학 교수 봉급의 약 세 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KIST 연구원의 월급 명세서를 확인하면서 “나보다도 월급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군.” 하고 웃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KIST는 해외에서 우수한 연구 인력을 유치하는 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초창기 연구 인력의 약 70%가 해외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KIST는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 속에 1969년 10월 23일에 준공되었다.

1966∼1970년에 KIST의 설립과 운영에 지출된 경비는 바텔 연구소 전문가들이 추정했던 1208만 달러에서 2341만 달러로 증액되었다. 그 중 미국 정부가 지원한 원조금은 전체 경비의 30%에 불과한 718만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연구소의 규모가 원안보다 크게 확대된 데다 추가적인 비용을 한국 정부가 떠맡았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였다. 1970년을 기준으로 KIST의 직원 수는 573명, 운영 경비는 약 11억 원으로 당시 원자력 연구소의 두세 배에 달했다.

KIST의 중점 연구 분야로는 재료·기계·전자·화학·식품 공학이 선정되었고, 그 밖에 공업 경제·건설·전산·기술 정보·분석 시험 등이 포함되었다. KIST는 창립 초기에 정부의 용역을 바탕으로 산업 발전에 대한 조사 연구를 중점적으로 수행하였다. KIST는 기계·철강·조선·자동차 ·전자 산업 등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발전 계획을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점차적으로 KIST는 산업체의 용역에 의한 연구도 수행했는데, 자동차 엔진 윤활유와 폴리에스테르 방사 기계의 성능을 개선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KIST는 1975년까지 연구 과제 300건, 연구 논문 280편, 특허 80건 등 짧은 기간에 상당한 수준의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

KIST는 1970년대 이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구 기관으로 성장하였다. 훗날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계를 이끌었던 많은 과학 기술자가 KIST를 통해 연구 경력을 쌓았으며, KIST의 각 연구실을 모태로 하여 분야별로 정부 출연 연구 기관들이 설립·분화되었다. 그러나 KIST에 정부의 지원이 집중되면서 다른 기관의 연구 활동이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기초 과학을 비롯하여 KIST가 담당하지 않았던 분야의 발전이 지체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73년에 특정 연구 기관 육성법이 제정되면서 주요 분야별로 특화된 정부 출연 연구 기관들이 잇따라 출현하였다. 1973년에는 선박 연구소와 해양 개발 연구소가 KIST 부설 기관으로 설립되었고, 1975년에는 한국 표준 연구소가 신설되었다. 이어 1976년에는 자원 개발 연구소·한국 화학 연구소·한국 기계 금속 시험 연구소·한국 전기 기기 시험 연구소·한국 전자 기술 연구소 등이 개편되거나 신설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사회 전 분야에 걸친 통폐합의 일환으로 16개의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이 아홉 개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의 타율적인 통합은 상당한 부작용을 유발하였고, 1990년을 전후로 대부분 원래의 상태로 환원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IST)와 한국 과학원(KAIS)은 1981년에 한국 과학 기술원(KAIST)으로 통합된 후 1989년에 한국 과학 기술 연구원(KIST)과 한국 과학 기술원(KAIST)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