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
  • 3. 북한 과학 기술의 어제와 오늘
  • 봉한 학설의 부침
김근배

비날론의 공업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무렵부터 북한의 과학 기술자들 사이에서는 ‘주체적 과학 기술’이 실현 가능할 뿐더러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박차를 가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이른바 ‘봉한 학설’의 등장이다.

봉한 학설은 주창자인 김봉한(金鳳漢, 1916∼?)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1941년 경성 제국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부속 병원의 내과 의사를 거쳐 경성 여자 의과 전문학교(고려 대학교 의과 대학의 전신)의 내과 조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6·25 전쟁 때 월북한 그는 1953년 평양 의학 대학의 생물학 교수가 되었고 의학 연구원 발기인, 평양 의학 대학 생리학 강좌장(남한 학제의 학과장 또는 과장과 같음)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짧은 시간 동안에 북한 의학계를 주도하는 인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서양 의학 전문가였던 김봉한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 한의학 연구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북한의 한의학은 광복 직후 한동안 푸대접을 받았다. 북한의 사상가들이 보기에 한의학은 철학적으로는 관념론적인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역사적으로는 중세 봉건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실천적으로는 미신적이고 인습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25 전쟁을 거치면서 한의학에 대한 평가는 큰 폭으로 바뀌게 되었다. 전쟁 통에 의료 인력과 약품을 넉넉히 공급할 수 없었던 북한 정부가 후방 지역의 보건 위생 사업 가운데 일부를 한의사들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북한 정부는 한의학에 대해 다시금 적극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한의학은 오랜 역사를 통해 대중들과 친숙했으며, 서민들의 일상적인 질환에 대해서는 임상적으로 뛰어난 효과를 보였을 뿐 아니라, 서양 의학에 비해 적은 돈과 자원으로도 시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 사상가들의 눈에 한의학 이론은 여전히 관념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비쳤다. 따라서 북한 사회에서 한의학의 뛰어난 임상적 효능을 살리기 위해서는 근대 과학의 개념·용어·방법을 이용하여 한의학 이론을 재정립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김봉한이 소속된 평양 의학 대학은 당시로서는 그 일을 맡기에 가장 적합한 기관이었다.

김봉한은 한의학의 주요 이론 중 하나인 경락(經絡)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에 돌입했다. 경락과 경혈(經穴)은 침과 뜸 시술의 이론적 바탕이었지만, 혈관계나 신경계 등의 조직과는 달리 인체를 해부했을 때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경락과 경혈이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조직이라면, 경락 체계에 바탕을 둔 한의학의 침구 시술은 존립 근거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김봉한은 경락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동위 원소 추적법·분광 분석법·전위 측정법 같은 현대적 실험 기법을 동원했다.

김봉한의 연구 결과는 1961년 8월 「경락 실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경락이 별도로 독립된 해부학적 실체로 존재한다.’는 대담한 주장을 실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학술 잡지에도 실리지 않는 등 한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62년이 되자, 발표된 지 1년이나 지난 김봉한의 논문은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북한 정부는 연초에 김봉한에게 예정에도 없던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는 대대적으로 그의 논문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남쪽의 우리로서는 그 까닭을 소상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1961년 비날론의 공업화가 성공한 뒤에 과학 기술계 안팎에서 주체적 과학 기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는데, 김봉한의 이론이 거기에 잘 들어맞는 것으로 뒤늦게 선택된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따름이다. 당대의 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경락의 실존을 입증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김봉한은 민족 고유의 의학 지식이 근대의 보편 과학과 접목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했고, 그것이 북한 과학계와 정계 지도자들의 눈에 들었으리라는 것이다.

1963년 11월에는 두 번째 논문 「경락 계통에 관하여」가 발표되었고, 김봉한의 경락 이론은 그의 이름을 따 봉한 학설로 불리게 되었다. 북한 정부는 김봉한의 경락 연구를 발 벗고 나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1964년 2월에는 평양 의학 대학의 경락 연구소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경락 연구원으 로 확대 개편되었다. 김봉한이 원장을 맡은 경락 연구원은 당시 최고 권위의 의학 연구 기관이었던 의학 과학원과 규모가 맞먹는 독립된 연구 기관이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조선 경락학회가 설립되었고, 김봉한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북한 정부는 김봉한에게 최고의 영예인 ‘인민상계관인(人民賞桂冠人)’ 칭호를 수여했으며, 과학 영화 ‘경락의 세계’를 제작하여 대중에게 공개하였다. 김봉한의 논문들은 영어·러시아 어·중국어·일본어·프랑스 어 등으로 번역되어 세계 여러 나라의 도서관에 배포되었다. 이는 북한의 과학 기술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봉한 학설을 세계에 자랑하고픈 성과로 여기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김봉한은 네 번째 논문 「산알학설」에서 더욱 획기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이 논문은 경락이 실존한다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경락을 근대 생물학의 밑바탕인 세포 이론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야심 찬 것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종래의 한의학에서 “기(氣)가 경락을 따라 흐른다.”고 이해했던 현상이, 실은 ‘봉한액’이 온몸에 퍼져 있는 ‘봉한관’을 따라 흐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봉한액 안에는 다량의 DNA를 함유한 ‘산알’이라는 조직이 있으며, 산알이 경락(봉한관)을 따라 순환하면서 산알로부터 세포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세포가 산알이 되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산알은 세포마저 아우르는 생명의 기본 단위가 되며, 생명 현상의 전 과정은 경락에 의해 지배 관장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연구자들은 세포의 생로병사의 이치를 알게 되었으니,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새로운 기원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한껏 고무되었다.

그러나 봉한 학설의 영광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65년 10월에는 김봉한의 다섯 번째 논문 「혈구의 ‘봉환산알—세포환’」이 발표되었지만, 그 학설의 대담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공식 간행물에서는 이에 대한 별다른 논평이나 소개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듬해인 1966년부터는 공식 출판물에서 김봉한과 경락 연구에 대한 언급 자체가 사라졌다. 그리고 같은 해 경락 연구원과 경락학회가 문을 닫았으며, 보건상 최창석과 의학 연구원장 홍학근도 경질되었다. 봉한 학설과 관련된 모든 기관과 인사들이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춘 것이다.

봉한 학설이 갑작스레 폐기된 배경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갖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다. 김봉한의 후원자였던 갑산파(甲山派)의 거두 박금철의 실각, 봉한 학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소련 과학계의 압력, 서구 근대 과학의 방법론을 도입한 데 대한 기존 한의학자들의 반발, 생체 실험 논란에 따른 정치적 부담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봉한 학설이 갑자기 떠오른 까닭이 분명치 않은 것처럼 갑자기 사라진 까닭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봉한 학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것이 하나의 과학 이론으로서 옳은지 그른지도 단정할 수 없다. 북한의 과학계에서 이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는 기록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북한에서 김봉한과 관련자들이 이미 자취를 감춘 뒤인 1967년에 소련 의학계에서 “경락에 대한 실체 발견을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북한은 이후 한동안 외국과의 학술 교류를 전면 중단하고 폐쇄화·은둔화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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