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
  • 4. 과학 기술자이자 시민으로
  • 과학을 배웠으나 할 곳이 없네
김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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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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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 초까지는 위의 분류를 따르자면 선구자나 계몽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우선 나라 밖으로 나가 과학 기술이 무엇인지부터 배워 오고, 돌아와서 배운 내용을 대중에게 알려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변수(邊燧, 1861∼1891)가 1891년 미국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졸업한 것이 조선 사람으로서 대학 수준의 과학 기술 교육을 마친 첫 번째 사례였다. 그 뒤로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이 1893년 컬럼비아 의대를 졸업하여 첫 번째 조선인 근대 의사가 되었다. 상호(尙灝, 1879∼?)가 도쿄 제국 대학 조선과를 1906년에 졸업하는 등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이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 선구자 가운데 과학 기술 연구는 고사하고 저술이나 교육에라도 종사했던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변수와 서재필은 모두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연루되어 각각 일본과 미국에 망명한 처지였으니, 애초부터 고국에 돌아와 과학 기술 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변수는 대학을 졸업한 바로 그 해에 열차 사고를 당해 머나먼 미국 땅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서재필도 1895년 잠시 귀국했으나 독립 협회 등의 정치 활동에 잠시 발을 담갔을 뿐 곧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일본 최고의 대학을 졸업한 상호는 귀국하여 관계로 투신, 일본인 통감이 좌지우지하던 정부에서 승승장구하여 요직을 맡았다. 정치적 격랑의 틈바구니에서 과학 기술 연구와 교육의 터전을 닦는 일이란 너무 사치스러운 꿈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과학 기술 전문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과학과는 동떨어진 일에 매달리는 일은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되었다. 더욱이 조선 총독부는 조선 사람이 고등 교육을 받는 것을 교묘히 방해하였기 때문에 과학 기술자 양성과 그들의 활동은 모두 지지부진하였다.

도리어 대중에게 과학 기술에 대한 기대를 가장 많이 불어넣었던 이는, 전문 과학 기술자가 아닌 비행기 조종사 안창남(安昌男, 1900∼1930)이었다. 1922년 안창남의 모국 방문 비행은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어린이들은 그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마치 1969년 미국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 소식이 세계의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과학에 대한 꿈을 심어 주었던 것처럼,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의 등장은 많은 이에게 과학 기술의 힘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과학 기술을 발전시킬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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