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
  • 4. 과학 기술자이자 시민으로
  • 최초의 조선인 이학 박사, 나라를 위해 꿈을 접다
김태호

1926년에 조선인 최초의 이학 박사가 탄생하였다. 바로 천문학자 이원철(李源喆, 1896∼1963)이다. 그는 1915년 연희 전문이 문을 열면서 수물과의 첫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1919년 졸업 후 한동안 모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가, 1922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시간(Michigan) 주의 앨비언 대학(Albion College)을 졸업하고 이듬해 미시간 대학교의 대학원에 들어갔다.

연희 전문 시절의 스승이었던 선교사 루퍼스(W. Carl Rufus, 1876∼1946)의 지도 아래 ‘독수리자리·에타 별(eta 〔η〕 aquillae)’이 맥동 변광성(脈動變光星)임을 밝혀 1926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록 맥동 변광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이가 조선에 없었던 탓에 그의 업적이 ‘이원철이 새로운 별을 발견했다.’는 식으로 다소 와전되기는 했으나, 그의 박사 학위 취득 소식과 소위 ‘원철별’ 이야기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원철의 연구 주제는 당시 미국 천문학계에서 한참 이목을 끌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까지 변광성이 생기는 원인에 대한 설명으로는 쌍을 이루어 도는 별이 서로를 가리기 때문에 별의 밝기가 변한다는 ‘식변광성(蝕變光星)’ 이론이 유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버드 대학교의 천문학자 샤플리(H. Shapley)가 “적색거성(赤色巨星)의 맥동(脈動)이 변광의 한 원인일 수 있다.”는 이론을 내놓자 그것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원철의 연구는 이를 입증하는 하나의 사례로, 미국 천문학회 등에서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만일 이원철이 미국에 남아 연구를 계속하고자 했다면 안정적인 직장을 잡는 것도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원철은 과학 기술의 기반이라고는 전혀 없는 고국 땅으로 돌아갈 것을 선택했다. 연희 전문의 은사 베커(Arthur Lynn Becker)의 권유도 한몫했을 테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 박사로서 모교에서 후학을 길러 내겠다는 그 나름의 결심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박사 학위를 따자마자 돌아와 모교인 연희 전문의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1928년에는 학교 건물 옥상에 현대식 굴절 망원경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가 계속 연희 전문에서 학생을 가르쳤더라면 제자도 많이 남기고 나름대로 하나의 학파를 일구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복 후 이원철은 다시 한 번 힘든 길을 가야 했다. 미 군정청의 군정 장관 하지(Hodge)가 총독부 기상대를 재건하는 일을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원철은 하지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후 1961년 물러날 때까지 16년 동안 국립 중앙 관상대의 대장으로 일하면서 매년 역서(曆書)를 발간하고 관측 설비 확충, 예보 인력의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등 우리나라 기상학의 기틀을 닦는 데 이바지했다.

이원철은 그 밖에도 인하 대학교의 초대 학장, 연세 대학교 재단 이사장 등으로서 사회에 공헌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 박사는 만 서른에 박사 학위를 받자마자 별 연구를 그만두었지만, 뒷날 별처럼 많은 과학 기술자가 우리나라에서 자라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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