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
  • 4. 과학 기술자이자 시민으로
  • 나라 재건에 나선 과학 기술자들
김태호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1948년에는 한반도의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일본인들이 독점했던 정부의 고위직을 채우기 위해 다방면에서 인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그에 따라 인문계 지식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적 활동이 적었던 과학 기술자들도 정·관계에 진출할 기회가 늘어났다.

과학 기술자 출신으로 가장 먼저 고급 관료가 된 이들 중 하나가 최규남(崔奎男, 1898∼1992)이다. 그는 1918년 송도 고등 보통학교를, 1926년 연희 전문 수물과를 각각 졸업한 뒤 1927년 미국으로 건너가, 1929년에는 오하이오 주 웨슬리안 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를 졸업하고, 1933년에는 미시간 주립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규남은 서울 대학교에서 재직하던 중 문교부 과학 교육국 국장(1948)을 거쳐 문교부 차관(1950∼1951)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서울 대학교 총장(1951∼1956)으로 봉직한 뒤 다시 문교부 장관(1956∼1957)을 지냈다. 이승만 정부 말기인 1958년에는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에 몸담기도 했다.

광복 당시 이미 명망 높은 기술자였던 안동혁(安東赫, 1906∼2004)도 비록 아홉 달 남짓한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상공부 장관(1953∼1954)으로 일했다. 안동혁은 경성 고등 공업학교(1926)와 일본 규슈 제국 대학 응용 화학과를 졸업(1929)하고, 경성 고등 공업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는 한편, 발명 학회의 과학 기술 보급 운동에도 참여하여 여러 신문과 잡지에 과학 기술 대중화를 위한 글을 실었다. 1930년대에는 중앙 시험소에 취직하여 한반도의 유지(油脂) 자원 연구와 공업용수 조사 등에 참여하였고, 화학 공업부장까지 직위가 올랐다. 당시 조선의 과학 기술 연구 기관은 운영진은 물론 연구진도 절대 다수가 일본인으로 채워져 있었다. 조선인 과학 기술자로서 연구부장을 맡았다는 것은 그의 연구 역량이 그만큼 뛰어났음을 보여 준다.

1945년 패망과 함께 일본인 산업가와 과학 기술자가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자, 안동혁은 산업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경성 고등 공업학교 출신 기술자를 규합하여 조선 학술원 기술부, 조선 공업 기술 연맹 등의 과학 기술자 조직을 결성하였다. 또 중앙 시험소와 경성 고등 공업학교를 접수하여 한국인을 위한 과학 기술 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중앙 시험소는 중앙 공업 연구소로, 경성 고등 공업학교는 경성 공업 대학을 거쳐 서울 대학교 공과 대학으로 각각 개편되어 뒷날 한국의 과학 기술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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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인리 화력 발전소
당인리 화력 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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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판유리 공장 준공식
인천 판유리 공장 준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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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혁이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된 것은 6·25 전쟁의 참화로 온 나라가 피폐해진 1953년 10월의 일이었다. 안동혁은 우리나라의 산업을 재건하기 위해 세 개의 에프(F), 즉 자금(Fund), 에너지와 연료(Force & Fuel), 비료(Fertilizer)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3F 상공 정책’의 일환으로 당시까지 주로 소비재 도입을 위해 이용되던 국제 연합(UN)과 미국의 원조 자금을 산업 건설에 사용하였다. 그 결과 총용량 10만 ㎾에 이르는 서울의 당인리 제3호기·마산 화력·삼척 제1호기 등 세 개의 화력 발전소가 1956년 완공되었다.

또 인천 판유리 공장과 문경 시멘트 공장 등의 산업 시설도 그의 재임 기간 중 건설이 시작되었다. 화학 비료 공장의 건설은 안동혁 스스로 가장 큰 업적으로 꼽는 것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실정으로는 무리라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규모의 요소 비료 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61년 완성된 충주 비료 공장은 식량 증산을 위한 비료 공급에 큰 힘을 보탰을 뿐 아니라, 숙련된 기술자들을 길러내는 터전이 됨으로써 다음 세대 공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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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시멘트 공장
문경 시멘트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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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공직 생활을 끝낸 뒤 안동혁은 다시 한양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대한 화학회와 한국 화공학회 등의 과학 기술자 조직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동혁은 이와 같이 일생 동안 연구자·교육자·정책가의 세 가지 역할을 두루 수행했다.

한편 1950년대 말에는 원자력이 우리나라 과학 기술계의 화두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이 추진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ic energy for peace)’ 계획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에도 연구용 원자로의 도입이 추진되었고, 관련 연구자들의 미국과 유럽 유학이 줄을 이었다. 이 원자력 유학생들은 원자력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걸쳐 서구의 발달한 과학 기술을 익히고 돌아와 뒷날 우리나라 과학 기술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따라서 원자력 기술 도입에 관련된 제반 사항을 추진하기 위해 1959년 발족한 원자력원(原子力院)은 1967년 과학기술처가 정식으로 문을 열 때까지 사실상 우리나라 과학 기술 행정 전반의 주무 부서 구실을 했다. 원자력 관련 기구의 운영에서도 여러 과학 기술자가 활약했다. 1940년에 일본 교토 제국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딴 박철재(朴哲在, 1905∼1970)는 문교부 기술 교육국장을 거쳐 원자력 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았으며, 서울 대 학교 공대에 재직하던 금속 공학자 윤동석(尹東錫, 1918∼1993)도 원자력원의 후신인 원자력청의 청장(1971∼1973)으로 일하였다. 화학자 최상업(崔相嶪, 1922∼2004)도 문교부 기술 교육국장(1960), 원자력 연구소장(1960∼1961)으로 활동했으며, 뒷날에는 국회의원(1981∼1985)으로 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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