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
  • 4. 과학 기술자이자 시민으로
  • 북녘의 과학 기술자들
김태호

한편 북한에서도 과학 기술자의 사회적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규모 면에서는 오히려 남한보다 더 많은 수의 과학 기술자가 정치·사회적 활동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과학 기술이 사회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지도적 원리로 여겨졌다는 점, 광복 후 명망 높은 과학 기술자가 다수 북한행을 선택한 결과 북한 지식인 사회에서 이공계 엘리트들의 입지가 매 우 강화되었다는 점, 또 북한 체제의 특성상 모든 사회 활동이 정치적 구호 아래 이루어진다는 점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즉 기술 관료 계층이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평양 신미리의 ‘애국렬사릉’에는 2002년 10월 현재 약 387위의 북한 국가 유공자들이 안장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과학 기술자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약 54위로 전체의 14%에 해당한다. 남한에서 과학 기술자가 처음으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된 것이 이태규(李泰圭, 1902∼1992)였던 것과 비교하면, 북한에서 과학 기술자의 사회적 공헌에 대한 인식이 한층 높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일례로 비날론의 발명으로 유명한 화학자 리승기(李升基, 1905∼1996)는 나라의 원로로 추앙 받아 90세 생일 때는 김정일 명의의 생일상을 대접 받기도 했으며, 사망 후 국장(國葬)으로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애국렬사릉에 묻힌 과학 기술계 인사들은 리승기를 비롯하여 PVC 공장을 건설한 화학자 려경구(呂烱九, 1913∼1977), 양자 물리학을 소개한 물리학자 도상록(都相祿, 1903∼1990)과 같이 탁월한 연구 업적을 남긴 이들도 있지만, 연구 이외의 활동으로 나라에 이바지한 이도 많다. 주요 업적이 ‘당 활동가’ 또는 ‘국가 활동가’로서 소개되고 있는 이들 중 몇 사람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강영창(姜永昌, 1912∼1965)은 경상북도 출생으로, 1937년 뤼순(旅順)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기사로 일하던 중 1945년 귀국하였다. 광복이 되자 건국 준비 위원회 경북 도지부에서 활동하다가 10월 월북하였다. 이후 흥남 지구 인민 공장 기사장 겸 부지배인, 성진 제강소 기사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초창기 북한의 산업 재건에 기여했다. 1950년 산업성 금속 관리국 기사장으로 관계에 입문하여 금속 공업성 부상(副相, 1954), 금속 공업상(1955) 등을 지냈고, 당 중앙 위원회 부장(1958)을 거쳐 북한 과학 기술계를 총괄하는 과학원의 원장(1961) 자리에 올랐다. 이처럼 과학 기술계·산업계·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친 강영창은 초창기 북한 과학 기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고용대(1918∼1984)는 농학자 출신의 농림 정책가이다. 함경남도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북청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사립학교 교원과 잠업 조수로 일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문천군 인민 위원회 부위원장(1945)을 거쳐 1952년에 임업국장으로 입각했으며, 국가 건설 위원회 부위원장(1960), 임업성 제1부상(1969) 등의 직책을 거쳤다.

김계현(1927∼1987)은 자강도의 빈농 가정에서 출생하여 광복 전에는 중국에서 광산 노동자로, 귀국 후에는 병원 소사로 일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다. 광복 후 강계 정치 학교를 다니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아, 1950년부터 5년 동안 소련의 농업 대학에서 농학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 당 중앙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1963년부터 농업 과학원 원장으로 일했다. 북한의 농업 정책을 세우는 데 일조했으며, 국제 협력 사업의 일환으로 기니 등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농업 과학 연구소 창설을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한편 애국렬사릉에 묻힌 것이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북한 정·관계에서 크게 활약한 과학 기술자로 리종옥(李宗玉, 1918∼1999)이 있다. 리종옥은 함경북도 출생으로, 1940년 만주 하얼빈 공대를 졸업하고 성진 제강소 기술자로 일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1948년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과 산업성 중공업 국장으로서 정계에 진출하였다. 1950년에는 산업성 부상으로 승진했으며, 1956년에는 전후 복구 과정의 공로로 당 중앙 위원회 중공업 부장이 되었다. 이후 당 중앙 위원회 위원(1956), 부수상(1960), 당 정치 위원회 위원(1961) 등 영전을 거듭했으나, 1968년 김일성이 새로운 경제 정책으로 내놓은 ‘대안의 사업 체계’를 비판하였다가 반당 분자로 지목되어 함경북도의 광산 지배인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3년 만인 1971년 광업상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 정무원 부총리(1976)를 거쳐 총리(1977)로 활동했 다. 1984년에는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부주석 자리에 올라,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가장 높은 공직에 오른 북한의 과학 기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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