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1. 녹색 혁명, 그 빛과 그림자
  • 기적의 쌀, 한국의 추위에 쓰러지다
김태호

1970년 증식된 IR667 계열의 종자 가운데 수원213호, 수원214호, 수원213-1호의 세 계통이 1971년 초에 농림부의 장려 품종으로 결정되었다. 이 신품종 벼에는 ‘통일(統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통일벼는 그 해 전국 61개소에서 지역 적응 시험을 거치는 한편 2750㏊에서 시범적으로 재배되었다. 시범 재배 결과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반반이었다. 추수 후 볏단을 말릴 때 낟알이 쉽게 떨어지는 탈립(脫粒) 현상이 일차적인 문제로 지적되었다. 또 질소 비료를 과다 사용하면 잎이 붉게 시드는 적고(赤枯) 현상이 보고되었고, 일부 병충해에 취약성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밥맛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러나 거두어들인 곡식의 양은 정책 결정자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만한 수준이었다. 정부는 통일벼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높이 샀고,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재배 면적을 넓히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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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벼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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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이른바 유신 체제의 강화를 꾀하던 대통령 박정희는 통일벼를 통한 식량 증산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통일벼는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잡종이므로 순수한 자포니카에 비해서는 쌀의 끈기가 적었다. 따라서 통일벼가 오랜 세월 차진 쌀을 귀하게 여겨 온 우리나라 사람에게 환영받을 것인지 회의적인 시각이 만만치 않았다. 김인환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1972년 2월 정부에 통일벼의 재배 전망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고위 관료 39명을 대상으로 통일벼로 지은 쌀밥의 시식회를 열었다. 이 시식회는 무기명으로 진행됐으나, 박정희는 무기명 평가지에 일부러 자기 이름을 쓰고는 ‘밥맛 좋음’이라는 의견을 제출함으로써 김인환의 손을 들어 주었다.

찰기 없는 밥맛이 통일벼의 유일한 문제는 아니었다. 낟알이 잘 떨어져 나간다는 점, 재래종에 비해 비료를 20∼30% 더 주어야 하므로 농가에 부담이 된다는 점, 키가 작아 당시에는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던 볏짚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 등이 여기저기서 거론되었다. 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972년의 통일벼 재배 면적을 18만 7471㏊로 대폭 늘렸다. 그러나 이 해의 통일벼 재배는 실패였다. 1972년의 여름은 예년보다 기온이 상당히 낮았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의 기후에 적응한 재래종은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지만, 따뜻한 아열대 품종을 조상으로 삼은 통일벼는 냉해를 입어 이삭이 제대로 패지 않았다. 더욱이 이삭이 여물기를 기다리느라 추수가 늦어지는 바람에 서리와 우박 피해까지 고스란히 입어야 했다. 언론에서는 ‘미숙 품종(未熟品種)에 겹친 천재(天災)’(1972년 10월 11일자 『조선일보』)라며 성급한 재배 면적 확대를 성토했다. 10월에는 국회에서 이에 대한 국정 감사가 열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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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하는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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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은 10월 중순 이후 『서울신문』 등의 지면을 이용하여 반론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냉해는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이며, 냉해 피해가 심했던 일부 지역을 빼면 나머지 지역에서 통일벼는 재래종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올렸다는 것이다. 둘째, 통일벼 재배의 어려움으로 지적되는 것은 통일벼의 특성에 대해 이해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면 모두 극복할 수 있는 만큼, 올해의 수확 감소 사태는 통일벼 종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재배 농민이 통일벼의 특성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탓이라는 것이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뒷날 농민들이 농한기마다 불려 나가 각종 교육을 받아야 했던 까닭을 설명해 준다. 기술의 생산자(농촌진흥청)가 기술을 보완하여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소비자(농민)가 부족한 기술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보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통일벼 보급에 관한 정부의 일관된 태도이었던 셈이다.

농촌진흥청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통일벼 재배 면적 확대는 벽에 부딪쳤다. 학계의 반대 목소리는 날로 높아져, 통일벼를 개발한 농학자들조차도 확대 보급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심지어 이웃 나라 한국의 식량 사정 불안을 걱정한 일본에서도 외교관을 통해 우려 의견을 전달해 왔다. 농민들도 신품종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는 흔히 말하듯 농민들이 보수적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첫째, 농민들은 통일벼가 비료와 농약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높은 추가 비용을 부담해 가면서 검증되지도 않은 신품종을 키운다는 것이 농민들에게는 마음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오늘날과 달리 1970년대 초반까지도 생산된 쌀의 절반가량이 농가 안에서 소비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농민에게 쌀은 상품이기에 앞서 자신이 먹을 식량이었으므로, 입에 맞지 않는 통일벼를 심으려는 농민은 많지 않았다.

셋째, 통일벼는 이모작에 불리했다. 재래종 벼의 생육 주기는 이모작이 가능하게끔 겨울보리나 겨울 채소류의 생육 주기와 겹치지 않게 맞추어져 왔다. 그런데 통일벼는 아열대 품종의 후손이어서 재래종에 비해 빨리 심고 빨리 거두어야 했다. 보리나 채소류가 채 여물기도 전에 수확해야 통일벼를 제대로 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벼의 수확량만을 놓고 보면 통일벼가 일반 벼보다 우수했을지라도, 농가 전체의 경제적 효과를 따져보면 어느 쪽이 나은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정부 안에서도 통일벼의 입지는 한층 좁아졌다. 농림부도 지역의 반대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2년 말 농림부에서는 ‘품종 선택은 농민의 자유 의사에 맡긴다.’는 방침을 확인하고, 특정 품종을 농민에게 권장하면 문책한다고까지 정했다. 신품종 ‘통일’의 앞날은 극히 불투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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