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1. 녹색 혁명, 그 빛과 그림자
  • 통일벼의 권토중래
김태호

정부 안의 우군이 없어진 상황에서 농촌진흥청은 독자적으로 통일벼 재배 면적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농촌진흥청은 각 지방에 말단 조직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농촌 지도사들을 통해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농림부의 특정 품종 권장 금지 정책에도 불구하고, 1973년에는 지난해의 3분의 2가량인 12만 1179㏊에 통일벼를 재배할 수 있었다.

농촌 지도사들은 ‘농가 방문 열 번 하기’라는 구호를 내걸고 농민을 일일이 만나 통일벼 재배를 권유하였다. 물론 정에 호소하는 방식이 전부는 아니었다. 농촌 지도사들은 비료와 같은 정부 지원 물자의 배분 권한을 쥐고 있었는데, 이는 통일벼 재배를 유도하는 좋은 미끼가 되었다.

재배 면적은 1972년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1973년은 여러 모로 통일벼에게 운이 좋은 해였다. 1972년에 비해 날씨가 따뜻해 통일벼는 순조롭게 자라났다. 가을이 되자 통일벼는 10a당 481㎏을 생산하여 350㎏을 생산한 재래종에 비해 30% 이상 더 많은 수확을 올렸다. 농촌진흥청으로서는 “통일벼는 우수한 품종이며, 재배법을 숙지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이 입증된 셈이었다. 더욱이 같은 해 8월에 농림부 장관으로 취임한 정소영(鄭韶永)은 김인환의 의견에 동조하여 통일벼 보급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겠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에 고무된 농촌진흥청은 통일벼 재배 면적 확대를 위해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여론 조성을 위해 녹색 혁명에 대한 책자를 각 기관에 배포하였다. 대통령도 다시금 힘을 실어 주었다. 박정희는 한때 통일벼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한 발 물러나 사태를 관망하는 듯했으나, 1973년의 작황 보고를 받고는 일선 농촌 지도 공무원들에게 200%씩 상여금을 지급함으로써 통일벼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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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벼농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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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2월에는 ‘쌀 3000만 석 돌파 생산’ 결의 대회가 열리고 농업 관련 공무원의 총동원 체제가 갖추어졌다. 공무원들은 1인당 일곱 개 정도의 부락을 맡아, 겨울철에는 농민들에게 통일벼 재배에 관한 주의 사항을 교육시키고 농번기에는 생육 상태를 감독하도록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통솔하기 위해 정부의 행정·지도 기관과 각 단위 농협 등이 모두 참여한 식량 증산 작전 상황실이 설치되었다. 이름부터 총력전(總力戰)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조직은 이후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휴일 없는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하였다.

‘군사 문화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 주기라도 하듯 행정력을 총동원한 결과, 1974년에는 여름 기온이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086만 석을 수확하여 ‘3000만 석 생산’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통일 쌀은 여전히 시장에서 인기가 없어 일반 쌀보다 낮은 가격에 팔렸다. 정부는 통일 쌀의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추곡 수매(秋穀收買) 제도를 활용하여 통일벼를 비교적 후한 가격에 사들였다. 추곡 수매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던 유복한 농민들은 비싸게 팔리는 일반 쌀을 계속 생산했지만, 중소농들은 이래저 래 통일벼를 심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추곡 수매로 마련된 정부미(政府米)는 군인과 도시 서민 등에게 수매가보다 낮은 가격에 팔렸다. 이들 또한 경제적 이유로 입맛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밥상과 농촌의 들녘에서 알게 모르게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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