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에는 통일벼 경작 면적이 27만 4000㏊로 더욱 확대되는 가운데, 통일 계열의 신품종들이 일반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은 1969년에 교배를 시작한 ‘유신(維新)’이었다. 유신(이리317)은 통일벼의 단점으로 지적되어 온 밥맛을 개선하고, 우리나라의 이모작 주기에 맞추어 늦게 심고 거둘 수 있도록 개량된 품종이었다.
일선 농업 지도 관서에서는 유신벼를 많이 심기 위한 충성 경쟁이 벌어졌다. 전북 완주군 농촌지도소에서는 건물 앞에 ‘통일벼로 통일, 유신벼로 유신’이라는 현수막을 크게 내걸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해의 수확량은 1974년보다 소폭 늘어나는 데 그쳤다. 유신과 조생통일(早生統一) 등 신품종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신품종들은 너무 일찍 이삭이 패는가 하면 병충해에 약했다. 더욱이 추수 직전에는 대규모의 벼멸구 피해가 일어났다.
1976년에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아, 수확량은 3621 만 5000석으로 늘어났지만 신품종의 문제점은 계속해서 드러났다. 그러나 정부의 해결책은 여전히 품종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매년 겨울마다 통일벼·유신벼의 특성과 재배할 때 주의 사항을 설명하는 교육 사업이 전국 농촌에서 벌어졌다.
농업 유관 공무원들은 겨우내 전국의 농촌을 돌며 농민들에게 “통일벼·유신벼는 추위에 약하니 모판에는 꼭 비닐을 씌워 보온해야 한다.”거나 “질소 비료를 많이 주면 뿌리가 썩을 수 있으니 반드시 정량 시비해야 한다.”는 등의 주의 사항을 가르쳤다. 소출이 늘어나기는 했으나, 농민들이 해야 할 일도 그만큼 늘어만 갔다. 끈질긴 교육 사업 덕분이었는지 1977년에는 큰 병충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한 해 농사를 마칠 수 있었다. 통일 계열 신품종의 재배 면적은 66만㏊까지 늘어났으며, 수확량은 4170만 석에 달했다. 3000만 석을 돌파한 지 3년 만에 4000만 석을 돌파한 것이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10a당 494㎏으로, 1975년 일본이 세운 세계 기록인 10a당 447㎏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쌀의 생산량이 수요량을 앞지르게 되자 박정희는 이를 ‘녹색 혁명 성취’로 선언하고, 관련자들에게 훈장과 포상금을 수여하였다. 정부 관련 부처에서도 앞을 다퉈 4000만 석 돌파를 기념하는 행사를 벌이고 기념물을 제작하였다. 통일벼는 그 영광의 정점에 서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