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1. 녹색 혁명, 그 빛과 그림자
  • 유신의 끝, 통일벼의 끝
김태호

그러나 파국은 영광의 바로 뒤에 찾아왔다. 녹색 혁명을 성취하였다고 선포한 바로 이듬해인 1978년에 통일 계열은 전국을 휩쓴 도열병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처음에 통일벼가 국내에 소개될 때는 재래종에 비해 도열병에 대한 저항성이 뛰어나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혔다. 그런데 통일벼가 짧은 시간 동안에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재래종이 걸리던 도열병의 병원체는 숙주를 잃어 세력이 약해졌다.

반면에 통일 계열에게 감염되는 새로운 돌연변이 병원체가 출현하자, 유전적 다양성이 없었던 통일 계열의 신품종은 속수무책으로 도열병의 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일반 벼를 심었던 논이 새로운 도열병의 피해를 덜 입었다. 더욱이 1970년대 말이 되면 일반 벼의 생산성도 통일벼 못지않게 높아졌다.

정부에서는 식량 증산이 오로지 통일벼 덕분인 것으로 선전해 왔지만, 쌀 생산량이 4000만 석을 넘어서는 데에는 일반 벼도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통일벼 재배를 강요받으면서 비료와 농약의 사용법을 교육받은 농민들은 이를 일반 벼 재배에도 응용했던 것이다. 통일벼가 첫 성공을 거두었던 1973년에는 통일 계열의 생산성(4.8MT/㏊)이 재래종(3.4MT/㏊)보다 40% 이상 높았다.

하지만 1978년에는 통일 계열(4.9MT/㏊)과 일반 벼(4.4MT/㏊)의 생산성 차이가 10% 안팎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비록 이해 통일 계열의 생산성이 1977년의 최고 기록(5.5MT/㏊)에 비해 도열병 때문에 현저히 낮아지기는 했지만, 5년 사이 재래종의 생산성이 ㏊당 1톤이나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통일 쌀은 여전히 일반 쌀보다 싼 값에 팔리고 있었다. 통일벼를 키워야 할 만한 이유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 큰 타격을 입은 통일벼의 생산성은 1979년에도 크게 회복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0년에는 1972년과 맞먹는 냉해가 닥쳤다. 쌀 생산고는 30% 가까이 폭락했다. 군사 쿠데타와 시민 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220만 톤이 넘는 쌀을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부터 통일 계열에 대한 권장 정책은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고, 1984년에는 공식적으로 농민의 자유로운 품종 선택이 확인되었다. 1989년 무렵에 통일 계열은 사실상 우리나라의 농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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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수량 변화(1971∼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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