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1. 녹색 혁명, 그 빛과 그림자
  • 포도밭의 황금
김태호

2000년대를 살아가는 중년 이상은 누구나 통일벼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추억은 농촌 사람에게는 보릿고개가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꽉 들어찬 곳간일 수도, 농촌지도소 직원의 발에 짓이겨진 일반 벼 모종일 수도 있다. 도시 사람에게는 주머니가 넉넉지 않을 때 정부미를 사 먹어야 했던 씁쓸함일 수도, 어쨌든 시장에 쌀이 부족하지 않게 되어 느꼈을 안도감일 수 도 있다. 비록 통일벼는 15년도 넘기지 못하고 농촌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이 당시 우리나라의 벼 생산량은 수요를 여유 있게 넘어서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도시락 검사’로 대표되는 1970년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을 통해 쌀 소비를 지속적으로 줄여 나간 덕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1970년대를 거치면서 쌀의 증산이 큰 폭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1970년대의 쌀 증산은 통일벼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비료와 농약의 이용, 농기계의 도입, 수리 시설의 정비, 국가 행정력의 적극적인 개입 등을 통해 통일벼와 일반 벼를 막론하고 생산성은 크게 높아졌다. 논에서 통일벼가 자취를 감춘 1980년대에도 쌀이 모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해 오던 것과 달리, 우리나라의 녹색 혁명에서 통일벼는 단독 주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영농 방식의 변화와 농업 기반 시설의 확충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렇다면 통일벼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첫째, 통일벼는 새로운 과학적 영농 기법이 농민들에게 확산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통일벼가 반강제적으로 보급되면서 통일벼를 심건 심지 않건 전국의 농민들은 비료와 농약을 쓰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이는 일반 벼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다. 둘째, 통일벼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농학은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광복 전 일본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우장춘(禹長春)과 같은 뛰어난 농학자가 있었다. 그러나 IRRI와의 협력 연구를 통해 한국 농학자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 농학을 접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이 얻은 지식과 경험은 통일 계열뿐만 아니라 일반 벼의 품종 개량에도 적용되었다. 통일 계열의 신품종 개발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허문회 등 통일벼 개발에 참여했던 농학자들과 그들이 길러낸 제자들은 지금도 활발한 품종 개량 사업을 벌이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육종학 수준은 세계에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근대 과학의 철학적 기초를 놓았던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16세기를 풍미했던 연금술(鍊金術)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연금술은 아마도 아들에게 자신의 포도원 어딘가에 금을 묻어두었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은 땅을 파서 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포도 뿌리를 덮고 있던 흙무더기를 헤쳐 놓아 풍성한 포도 수확을 이룰 수 있었다. 금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유용한 발명과 유익한 실험들을 가져다 주었다.

일반 금속을 금으로 바꾸겠다는 연금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기적의 쌀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릿고개에서 해방시키겠노라는 통일벼의 꿈도 결과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연금술이 생산한 지식과 연금술사들의 경험이 뒷날 근대 화학을 낳는 밑거름이 되었듯이, 통일벼를 연구·보급하는 과정에서 쌓인 지식과 경험은 뒷날 우리나라의 농학과 농정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가 되면 비록 통일벼는 역사적 소임을 다 하고 사라져 갔지만 보릿고개라는 말도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녹색 혁명 이야기의 결말은 다소 우울하다. 한국의 사례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녹색 혁명의 성공 사례로 일컬어졌지만, 정작 우리나라 농민들은 그다지 행복해지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사라지고 농촌의 소득은 계속 증가하였으나, 도시 가구의 소득이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농가와 도시 가구의 소득 격차는 계속 벌어졌다. 그 결과 소수의 유복한 농민만이 기업농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 대다수의 중소 농민들은 지속적으로 위축되었다. 쇠락해 가는 중소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정부미를 사 먹어야 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바야흐로 값싼 외국산 쌀이 우리의 밥상 위에 올라올 날이 멀지 않았건만, 우리나라의 농업이 자생력을 갖출 수 있게 하는 정부 차원의 청사진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배웠다는 사람들이 신문과 방송에서 “쌀 시장을 내 주는 대신 휴대폰을 더 많이 수출하면 그것이 국익이 아니냐?”는 말을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 농정(農政)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농촌은 ‘쌀 공장’이 아니고, 농촌 문제는 쌀 생산이 늘어나면 저절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복잡한 사회적 문제가 기술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지난 시대 우리가 그토록 매달려 왔지만 결국에는 배반당하고 말았던 믿음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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