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2. 1970년대의 기적 포항 제철
  • 포항 제철소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송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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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은 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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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 9일은 ‘철의 날’이다. 그날은 첫 출선(出銑)의 감격을 기념하기 위해 정해졌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용광로인 포항 제철소의 1고로가 1973년 6월 9일에 첫 쇳물을 배출했던 것이다.

포항 제철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 제철소(integrated steel mill)이다. 철강의 제조 공정은 철광석 등의 원료를 사용하여 선철(銑鐵, pig iron)을 생산하는 제선(製銑) 부문, 선철 혹은 고철(古鐵)에서 반제품인 강철(鋼鐵, steel)을 만드는 제강(製鋼) 부문, 반제품을 가공하여 최종 제품을 생산하는 압연(壓延)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세 부문이 한 장소에 집적된 제철소를 일관 제철소라고 한다. 한 곳에 모든 공정이 갖추어져 있는 만큼 운송 비용과 작업 시간을 절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은 1970년부터 시작되어 1983년에 완료되었는데 그 개요는 표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의 개요’와 같다. 포항 제철을 배경으로 우리나라의 철강 생산량은 1970년 50만 톤에서 1975년 253만 톤, 1980년에는 856만 톤으로 10년 만에 17배가 넘는 성장을 기록했다. 1968년에 설립된 포항 제철(2002년 포스코로 변경)도 처음에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한 기업에 불과했지만 1983년에는 세계 11위의 철강업체로 부상하였다.

우리나라는 일관 제철소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 철강 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던 일본의 협조를 바탕으로 포항 제철소를 건설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철강 업체인 신일본 제철(新日本製鐵)과 일본 강관(日本鋼管)이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을 도왔는데, 그들은 JG(Japan Group)로 불렸다. 일본이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이유는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이 가져다 줄 경제적 이익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포항 제철소 1기 사업에 필요한 설비의 가격만 해도 당시에 일본 전체가 플랜트 수출로 거둬들인 금액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였다.

<표>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의 개요
구분 1기 2기 3기 4기 1차 4기 2차
생산 능력
(누계)
103만 톤 157만 톤
(260만 톤)
290만 톤
(550만 톤)
300만 톤
(850만 톤)
60만 톤
(910만 톤)
착공일 ’70. 4. 1. ’73. 12. 1. ’76. 8. 2. ’79. 2. 1. ’81. 9. 1.
준공 예정일 ’73. 7. 31. ’76. 6. 30. ’79. 4. 30. ’81. 6. 20. ’83. 6. 15.
준공일 ’73. 7. 3. ’76. 5. 31. ’78. 12. 8. ’81. 2. 18. ’83. 5. 25.
건설 공기 39개월 29개월 28개월 25개월 21개월
공기 단축 28일 30일 143일 122일 20일

철강 산업은 대규모 장치(裝置)에 의존하는 산업으로 생산 설비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300만 톤 규모의 제철소 건설에는 30억 달러가 소요될 정도로 철강 산업은 막대한 투자를 요구한다. 또한 한번 설치된 설비는 대략 20년 정도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회수 기간이 길다. 그뿐만 아니라 철강 기술은 설비에 체화(體化)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설비의 특성이 기술 활동의 성격을 강하게 규정한다. 우수한 설비를 설치하면 그만큼 배울 것이 많은 것이다. 이처럼 철강 산업의 수익성과 기술 활동은 생산 설비의 성격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철강 산업의 성공 여부는 어떤 설비를 선택하느냐가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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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종합 제철 주식회사 창립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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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에서는 성능이 우수한 설비를 선택하는 데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 당시의 설비 수준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1980년을 전후하여 선진국의 철강 인사 및 언론 매체가 평가했던 내용을 감안한다면 포항 제철소는 일본의 주요 제철소에 필적하는 수준의 설비를 보유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3기 사업이 종료된 직후인 1978년 12월 13일에 신일본 제철의 사이토(齊藤英四郞) 사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포항 제철소는 일본의 제철소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분명히 얘기할 수 있으며……. 세계 최신예 수준으로 자랑해도 좋은 제철소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했으며, 4기 설비가 완공된 후인 1981년 3월 18일에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는 “포항 제철의 설비들은 매우 능률적인 일본의 제철소들보다 현대적인 시설이어서……. 한국의 철강 산업은 전반적으로 미래에 대해 낙관할 수 있다.”고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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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철 기공식
포항 제철 기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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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포항 제철은 설비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설비 구매를 담당했던 기술진의 부단한 노력이 가져온 결과이지만 당시에 설비 구매에 대한 환경이 양호했다는 점도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1970년대에 선진국에서는 추가적인 제철소 건설이 거의 추진되지 않았고, 다른 개발도상국에서도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가 많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국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선진국 기업들 사이에 치열한 수주 쟁탈전이 벌어졌고 포항 제철은 이러한 경쟁 관계를 활용하여 우수한 설비를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설비 구매와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개발도상국의 대규모 프로젝트에는 정치권이 개입해서 이권을 챙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당시 우리나라의 몇몇 정치가도 포항 제철이 설비를 구매할 때 특정 업체를 거론하면서 일정 비율의 뇌물을 정치 자금으로 제공하라는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포항 제철의 사장인 박태준(朴泰俊)은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설비 공급사 선정에 대하여 재량권을 인정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박정희는 박태준의 건의문에 친필로 서명해 주었고 ‘종이 마패’로 불린 그 문건은 설비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정치권의 압력을 배제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만약 정치권의 개입이 차단되지 않았다면 구입한 설비의 성능이 보장되지 않아 포항 제철소가 높은 생산성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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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당시의 포항 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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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당시의 포항 제철
건설 당시의 포항 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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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의 개요’에서 보듯이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은 계획보다 조기에 종료되었다. 더구나 2기 이후의 확장 사업은 1기 사업에 비해 건설 기간이 짧게 계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공기가 단축되었다. 포항 제철소의 건설 기간은 20∼40개월이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매우 빠른 것이었다. 인도·브라질·이란 등의 국가에서는 비슷한 규모의 제철소를 짓는 데 빨라야 4년, 늦을 경우에는 9년도 소요되었다. 이러한 공기의 단축은 저렴한 설비 구매 비용과 결합되어 포항 제철은 매우 경제적으로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었다.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에는 1톤당 250∼470달러의 비용이 소요되 었으며, 그것은 외국 제철소의 2분의 1에서 3분의 2에 해당하였다.

당시 포항 제철의 기업 문화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우향우(右向右) 정신’이다. 포항 제철소 건설 현장의 오른쪽에는 영일만이 있다. 만약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국가와 국민에게 대역죄(大逆罪)를 짓게 되므로 우향우를 해서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죽을 각오로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에 임해야 한다! 성공 아니면 죽음, 그 이외의 선택은 없다!’ 그러한 각오를 가지고 당시 포항 제철의 임직원들은 제철소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고, 우향우 정신이 가시화된 성과 중의 하나가 공기 단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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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된 고로 전경
완공된 고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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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단축을 위해서는 비상사태의 선포와 같은 극한적인 방법도 동원되었다. 예를 들어 1기 사업에서 열연 공장의 건설이 지연되자 ‘무조건 하루에 700㎥의 콘크리트를 타설하라.’는 ‘열연 비상(熱延非常)’이 선포되었다. 하루에 250∼450㎥의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지만 24시간 철야 작업을 통해 목표량을 700㎥로 설정했던 것이다. 열연 비상은 포항 제철 직원들이 격일제로 밤을 새우고, 1일 책임량을 채우지 못한 감독의 승진을 중지시키며, 졸고 있는 운전기사를 깨우고 흩어져 있는 인부들을 찾아다니며, 레미콘은 물론 리어카까지 동원되는 등 전쟁터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포항 제철의 비상사태는 처음에 건설 공기를 준수하기 위하여 선포되었지만 나중에는 건설 공기를 단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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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철소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포항 제철소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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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철소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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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철의 비상사태는 제철소 건설에 대한 학습이 집중적으로 수행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당시 기술자들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엔지니어가 직접 공사를 감독함으로써 상당히 많은 것을 배웠고, 공사 감독을 하면서 작업 내용도 모른 채 지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건설 관리 기법을 직접 터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동시 비상사태는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이 군대식 문화에 입각하여 추진되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우리나라 사회가 1980년대 중반 이후에야 민주화의 단계에 진입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1970년대가 아니었더라면 이러한 극한적인 공사 방식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은 최고 경영자의 판단과 지시에 크게 의존하였다. 박태준은 설비 구매에서 건설 관리에 이르는 거의 모든 범위에 걸쳐 중요한 사항을 지시하였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다. 특히 박태준은 단순한 최고 경영자가 아니라 조직 구성원들에 대한 역할 모델(role model)로 인식되었다. 그는 포항 제철소 건 설 현장에 상주하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고,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그것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박태준은 경영상의 지식뿐만 아니라 기술적 지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판단과 지시는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정부도 포항 제철을 매우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정부는 1970년에 포항 제철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하여 철강 공업 육성법을 제정했다. 그 법은 지원 대상을 연산 100만 톤 이상의 일관 시설 보유자로 제한했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기업은 포항 제철밖에 없었다. 또한 정부는 1973∼1979년에 중화학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철강·화학·비철금속·기계·조선·전자 산업을 6대 전략 산업으로 선정하였다. 그 중에서도 철강 산업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가 부여되었으며 포항 제철에 엄청난 지원이 이루어졌다. 그 밖에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13번에 걸쳐 포항 제철소 건설 현장을 방문하는 등 정부의 포항 제철에 대한 관심과 기대도 컸다.

사실상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은 매년 1000억 원 이상이 소요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정부의 강력한 지원 없이는 추진되기 어려웠다. 실제로 포항 제철소 건설 사업에 투입된 13조 8546억 원 중에서 47.7%가 정부의 지원에 의한 재정 출자·정책 금융·외국 차관의 형태로 조달되었으며, 조세 감면·관세 감면·사회 간접 자본 조성·공공요금 할인 등을 통한 정부의 지원 금액도 약 8300억 원에 달했다. 특히 포항 제철은 정부의 기금이나 민간의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도 대출 규모가 가장 크고 이자율이 가장 낮은 예외적인 존재로 취급되었다.

포항 제철은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철강 산업을 독점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수적인 성장 전략을 취하지는 않았다. 포항 제철은 1973년부터 지속적으로 흑자를 창출하면서 이윤을 사내에 유보시켜 제철소 확장 사업에 투자해 왔다. 게다가 포항 제철은 다른 기업에 비해 저렴한 내수 가격으로 생산품을 공급하였다. 중화학 공업화 정책의 혜택을 받았던 대부분의 기업들이 해외 수출에서의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매우 비싼 내수 가격을 보장받았지만 포항 제철은 그러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처럼 포항 제철은 정부의 지원에 부합하는 실적을 달성함으로써 기업과 국가가 동시에 성장하는 ‘상호 배양(相互培養)’의 효과를 구현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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