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2. 1970년대의 기적 포항 제철
  • 맨투맨 작전의 해외 연수
송성수

포항 제철이 제철소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했던 가장 중요한 원천은 해외 연수였다. 그것은 “공장의 성공적인 건설이나 정상 조업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해외 위탁 교육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는 포항 제철의 공식 기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당시 국내 철강 업계에서 축적된 기술은 특정한 공정에서 소규모 설비를 가동하는 데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대규모 일관 제철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술은 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외 연수는 준비 교육·본 교육·사후 관리의 단계를 거쳐 전개되었다. 포항 제철은 해외 연수 후보자를 2배수로 선정한 후 준비 교육 결과에 따라 절반을 탈락시킴으로써 해외 연수 대상자를 엄선하였다. 그들은 해외 연수에 앞서 3∼6개월에 걸쳐 다양한 준비 교육을 받았다. 준비 교육의 내용에는 일상 회화 및 철강 용어에 대한 외국어 교육, 철강 산업에 대한 기초 지식, 외국에서의 교육 방법 및 태도, 외국의 역사 및 지리에 대한 상식,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전문 지식에 대한 교육은 소속 부서장의 책임 아래에 이루어졌고 다른 교육은 제철 연수원이 담당하였다. 해외 연수 요원이 선발되면 해당 분야별로 팀을 구성해 해외 연수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한 후 이에 대한 교육이 집중적으로 실시되었다.

더 나아가 포항 제철은 해외 연수 요원이 연수 기관으로 출발하기 전에 현재 자신이 맡은 일이 회사와 국가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하 여 정신 교육을 실시하였고, “연수 기관과의 계약 사항인 커리큘럼이나 일정표에 구애받지 말고 맨투맨(man to man) 작전으로 상대편의 기술을 빠짐없이 배워 오라.”고 주문했으며, “연수자 중에서 성적이 불량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경고도 서슴지 않았다. 고(故) 이병철 삼성 그룹 회장은 포항 제철의 해외 연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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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에게 강의하는 박태준
직원들에게 강의하는 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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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박태준 회장이 직원들을 일본에 연수 보내면서 훈시하기를 “여러분은 각자 맡은 분야의 기술을 남김없이 습득해 와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이외에 다른 기술 한 가지 이상씩을 가지고 오라. 그렇지 않으면 귀국 후에 나를 다시 볼 생각조차 하지 마라.”고 했다 한다. 연수생들은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뒤 하나같이 박 회장에게 와서 약속대로 자기가 맡은 과목 이외의 기술 한 가지씩을 내놓더라는 것이다.

포항 제철의 해외 연수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JG는 기술을 전수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예를 들어 1969년에 무로란(室蘭) 제철소에서 연수를 받았던 김기홍은 “일본 철강 업계의 거두들이 친히 와서 명강의를 했고, 일본 사람들 특유의 치밀함과 친절 덕분에 3개월 후에는 제법 철강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회고했으며, 1972년에 제강부 계장으로 일본 강관에서 연수를 받았던 홍상복은 “일본 강관이 형님뻘인 신일본 제철에 뒤지지 않기 위하여 더욱 성심껏 기술을 지도하면서 연수생이 요구하는 자료는 거의 제공하였다.”고 회고하였다. JG의 관계자들은 제철소 조업과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담을 들려주거나 규범·규격·편람 등 각종 자료를 만들어 주었으며, 연수 요원들이 실제 작업에 참여하여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JG의 협조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포항 제철의 해외 연수 요원들이 교육 훈련에 능동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교육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강사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했으며,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은 언젠가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암기하였다. 또한 그들은 제철소 운영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어떤 연수팀의 경우에는 열두 상자나 되는 자료를 포항으로 우송하느라 큰돈을 써버려 나중에는 연수비가 모자라 애를 먹을 정도였다. 이에 대하여 JG의 기술자들은 “그들이 일본에 오기 전에 회사에서 자료를 많이 받아 올 것을 명령받았던 것 같다.” 또는 “그들의 처지에서는 가지고 가는 자료의 두께가 연수 실적에 비례한다는 공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더 나아가 포항 제철의 해외 연수 요원들은 현장 실습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JG의 담당 기술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보충하였다. 예를 들어 포항 제철 초창기에 열연 분야의 연수팀을 인솔했던 김종진은 “우리 기술진들은 일본 기술자들한테 술값이 엄청 들어갔을 정도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접근하였고……. 설계도만 보면 정신을 번쩍 차리고 주머니에 쑤셔 넣거나 눈에 담곤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해외 연수팀은 정규 교육이 끝난 뒤에도 개인적인 시간을 제약하면서 교육 내용과 자료를 정리하여 기록하는 것은 물론, 당일 교육의 성과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여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작업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개인의 연수 노트를 검사하여 성실한 요원에게 상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금을 부과하는 방법을 통해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72년에 진행된 고로 조업에 관한 JG 연수는 포항 제철의 해외 연수가 가진 또다른 특징을 보여 준다.

첫째, 당시에 국내에서는 고로 조업에 대한 경험이 특히 부족했기 때문에 포항 제철 제선부는 가능한 한 많은 직원이 해외 연수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JG와의 기술 용역 계약에서는 작업장(作業長) 한 명당 6개월씩 연수를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포항 제철 제선부는 조로 기술원(操爐技術員)이라는 부(副)작업장 직제(職制)를 추가적으로 편성하여 연수 인원을 증가시켰다. 이에 따라 제선 분야의 해외 연수 요원들은 고로 조업에 대한 JG 연수를 통해 작업장이 주상(鑄上) 작업을, 부작업장이 노황(爐況) 컨트롤을 담당하는 입체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둘째, 포항 제철 제선부의 연수 요원들은 연수 중에 발생한 사고를 기회로 전환시켜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훈련을 받았다. 당시 연수 기관이었던 가마이시(釜石) 제철소에서는 노황부조(爐況不調) 현상으로 쇳물이 넘쳐 나와 노열(爐熱)이 급격히 떨어지고, 고로 내부 용융물의 흐름이 지연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연수생들은 노황부조 사고를 복구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생각하고, 일본 측을 설득하여 실제 상황에서 협동 훈련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각 분야별로 업무를 분담하여 발생하고 있는 현상 과 이에 대처하는 방식을 치밀하게 관찰했는데, 그때 사용하였던 공구류를 빠지지 않고 스케치하였다.

포항 제철은 해외 연수 요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함으로써 교육 훈련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해외 연수의 관리와 관련하여 도착 보고 및 결과 보고가 의무적으로 실시되는 것은 물론 2개월 이상 장기 연수의 경우에는 월 2회의 중간보고와 귀국 예정 보고가 추가되었다. 또한 해외 연수 요원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 보직되었으며, 2년 동안 포항 제철에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했다.

이러한 인사 조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포항 제철이 연수 자료의 축적과 전파 교육(傳播敎育)의 실시도 해외 연수 요원의 임무에 포함시킴으로써 해외 연수의 결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해외 연수 요원들이 가져온 각종 자료는 거의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되어 직원 교육을 실시하거나 기술 계획을 수립할 때 활용되었고, 해외 연수 요원들은 전파 교육을 통해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과 신선한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앞서 말한 고로 조업 연수의 경우에 “30여 명의 일본 연수생들이 교사가 되어 100여 명의 조업 요원에게 교육을 실시했다.”고 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전파 교육을 받은 직원 수는 해외 연수 요원의 세 배를 넘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포항 제철은 해외 연수 요원이 새롭게 충원되었던 인력에게 전파 교육을 실시하는 방법을 통해 공장이 완공되기 전까지 1일 3교대 근무에 필요한 조업 요원을 구성할 수 있었다.

포항 제철이 해외 연수를 통해 획득했던 대부분의 기술은 공장 조업에 관한 것으로서 선진국에서는 이미 표준화된 성숙 기술에 해당하였다. 이처럼 포항 제철의 해외 연수는 성숙 기술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기술의 습득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빠른 시일 내에 가시적인 성과가 유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철강 산업의 경우에는 실제적인 설비 가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조업 기술을 축적할 수 없으며, 특히 1970년대 초반에는 생산 공정이 충분히 전산화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현장 훈련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일관 제철소를 가동시켜 본 경험이 없었던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에서는 대규모 제철 설비에 대한 조업 기술이 첨단 기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일본은 공장 조업과 같은 성숙 기술의 이전에는 호의적이었지만 전산 및 품질과 같은 고급 기술의 이전은 기피하였다. JG는 기술 용역 계약을 체결하면서 ‘전산화에 관한 협력은 제외한다.’고 명기하였고 품질에 관한 것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처럼 JG는 공식적으로는 전산 및 품질에 관한 기술 협력을 거부했으나, 해외 연수를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포항 현장에서 관련 기술을 지도함으로써 전산 및 품질에 관한 기술 습득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를 들어 1971년에는 수작업 공정 관리에 국한되었지만 생산 관리 요원의 JG 연수가 실시되었고, 1972년에는 JG 연수의 일환으로 품질 관리 요원 세 명이 파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확보한 자료는 포항 제철이 생산 관리와 품질 관리의 체계를 구축하는 출발점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일본이 모든 시기에 걸쳐 기술 이전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도 아니었다. 일본은 포항 제철소 1∼2기 사업 기간에는 기술을 전수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3기 사업을 전후해서는 기술 이전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일본은 포항 제철이 아주 뒤떨어진 거리에서 따라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포항 제철의 규모와 생산성이 점차적으로 향상되면서 잠재적인 경쟁자로 부상하게 되자 이를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포항 제철에서 생산된 제품이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1980년대 초반에 광양 제철소 건설 사업이 추진될 때에는 일본이 공식적인 기술 협력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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