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3. 한글의 기계화
  • 가장 간단한 문자?
김태호

우리는 흔히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간단하고 배우기 쉬운 문자 체계’라는 주장을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물론 한글은 자모의 숫자만 놓고 보면 가장 간단한 문자 체계 중 하나이다. 그러나 한글만의 고유한 특징인 모아 쓰기는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에게 매우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다른 나라의 문자 체계에서도 특정한 음소나 강세 기호(악센트)를 다른 글자의 위나 아래에 붙여서 모아 쓰는 경우가 있지만, 한글처럼 모든 음절이 시각적으로 구분되도록 초성·중성·종성을 모아 쓰는 문자는 없다.

모아 쓰기는 시각적으로 음절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점이 있지만, 한글 기계화에는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 까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한글 타자기는 한 음절 글자 안에 받침을 모아 쓰기 때문에, 알파벳 타자기처럼 한 글자를 찍을 때마다 종이가 한 칸씩 움직인다면 받침을 제자리에 찍을 수 없게 되는 문제이다. 따라서 모든 글쇠가 글자를 찍을 때마다 종이를 움직이게 하는 움직글쇠(moving key)인 알파벳 타자기와는 달리, 한글 타자기의 글쇠 중 일부는 글자가 찍혀도 종이가 움직이지 않는 안움직글쇠(silent key)여야 한다.

둘째, 모아 쓰는 과정에서 낱글자들의 모양이 조금씩 바뀌는 문제이다. ‘ㄱ’은 초성으로 쓰일 때는 열네 가지(겹자음까지 생각하면 스물여덟 가지), 종성으로 쓰일 때는 두 가지의 다른 모양을 갖게 된다. 중성에 쓰이는 모음도 두 가지 또는 네 가지(복모음으로 쓰이는 ‘ㅗ’, ‘ㅜ’의 경우)의 서로 다른 모양을 갖게 된다. 따라서 활자 인쇄처럼 균형 잡힌 글자를 타자기로 만들어 내려면 적어도 300여 개의 글쇠가 필요하다. 기존의 영문 타자기를 개조해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숫자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자기를 설계하는 사람들은 몇 벌의 글쇠를 만들지 결정해야 했다. 네모반듯한 글자를 찍으려면, 미묘한 차이를 무시하더라도 적어도 네다섯 벌의 글쇠는 갖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다섯 벌의 글쇠라면 초성 자음에 두 벌(세로로 긴 모음과 어울릴 때, 가로로 넓은 모음과 어울릴 때), 중성 모음에 두 벌(받침이 있을 때, 받침이 없을 때), 종성에 한 벌 하여 다섯 벌이 되는 것이다. 다만 하나의 낱글자가 여러 글쇠에 배당되면 외우기가 어렵고 타자하는 것도 그만큼 더뎌진다. 그래서 미관(美觀)을 중시하는 이들은 글쇠의 벌 수를 넉넉하게 잡았던 반면에 타자의 속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은 음절 글자의 모양이 반듯하지 않더라도 글쇠의 벌 수를 줄이는 길을 택했다.

<표> ‘ㄱ’의 다양한 글자 모양
초성(ㄱ) 중성(ㅜ) 종성(ㄱ)
가 고 과 구 귀 그 긔
각 곡 곽 국 귁 극 긕
까 꼬 꽈 꾸 뀌 끄 끠  
깍 꼭 꽉 꾹 꿕 끅 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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