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3. 한글의 기계화
  • 군과 한글 타자기
김태호

6·25 전쟁은 이 땅에 사는 많은 이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한글 타자기를 연구하던 발명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에서 자신의 타자기를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송기주는 납북되고 말았다. 뒷날 타자기를 연구하러 동구권에 가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도 있으나, 납북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공병우에게도 6·25 전쟁은 큰 계기가 되었다. 공병우는 전쟁 전 이른 바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으로 좌익 계열과 악연을 맺었던 탓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연행되었다. 그러나 그의 발명에 관심을 보인 인민군 장교에게 타자기 설계도를 그려 주기로 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감시를 피해 달아난 뒤 부산으로 피난을 간 공병우는 해군 참모 총장 손원일(孫元一)이 ‘공병우를 찾는다.’며 낸 신문 광고를 접했다. 손원일은 일찍이 타자기 시제품을 들고 정부 각 부처를 돌아다니던 공병우를 눈여겨보았다가, 전쟁 중에 해병대원들에게 타자 교육을 시키기 위해 그의 소식을 수소문했던 것이다. 남북한의 군인이 모두 공병우의 타자기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은 남한 공무원들이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대조된다. 한자를 많이 사용하고 문서의 양식과 형태를 중시했던 문관(文官)들과는 달리, 무엇보다 빠른 의사 전달을 중요하게 여겼던 군인들은 일찍부터 한글 위주로 문서를 작성했으며, 형태보다는 속도를 중시했다. 이것이 공병우 타자기의 특징과 잘 들어맞았던 것이다. 남북한의 군에서 타자에 관심을 보인 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타자기를 적극적으로 군사 업무에 활용한 미국과 소련의 영향도 있었다.

손원일의 지원 아래 군은 공병우 타자기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손원일은 해병대 타자 교육을 위해 200여 대의 공병우식 타자기를 군수 물자로 미국에서 들여왔다. 6·25 전쟁 기간 동안 체제를 갖추게 된 여군도 타자를 익혀 특기 병과로 삼았다. 공병우 타자기로 타자를 익힌 여군 타자수들은 육·해·공 각 군의 타자수를 양성하는 교관으로 활동했다.

공병우 타자기와 군의 인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61년에 일어난 5·16 군사 정변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군사 문화로 물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공무원 사회도 군대의 업무 양식을 따르게 되었는데, 타자기를 이용한 문서 작성도 그 중 하나였다. 내무부에서는 행정 장비 근대화 계획의 하나로 전국 시·군마다 한글 타자기를 30대씩 구입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미 군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던 공병우 타자기는 이를 계기로 차츰 민간 분야로도 판로를 넓혀 나갔다. 정부 기관 중에서도, 특히 국방부와 외무부를 중심으로 수천 대의 공병우 타자기가 운용되었다. 여기에는 해군을 거쳐 주독 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손원일과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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