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3. 한글의 기계화
  • 시대를 너무 앞섰던 송계범
김태호

당시 시장에 선을 보였던 여러 타자기 중에서도 독특한 것으로는 물리학자 송계범(宋啓範)이 1956년 완성한 ‘보류식 인쇄 전신기(保留式印刷電信機)’를 들 수 있다. 인쇄 전신기(텔레타이프·텔레프린터)란 전보를 보내기 위해 글을 입력해 전기 신호로 바꾸고, 그것을 받아 출력하는 기계를 말한다. 보류식이란 글쇠를 누르면 그것을 바로 신호화하지 않고 한 음절 글자가 완성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신호화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강아지’라는 단어를 입력할 때, ‘ㄱ’, ‘ㅏ’ 두 자모가 입력되고 나서 세 번째 자음 ‘ㅇ’이 입력되면, 기계는 일단 다음 자모의 입력을 기다린다. 만일 다음에 모음이 나온다면 세 번째로 입력된 ‘ㅇ’은 다음 글자의 초성인 것이고, 또 자음이 나온다면 이 글자의 종성이므로, 다음 입력 ‘ㅇ’을 기다린 뒤 ‘강’이라는 글자를 통째로 종이에 찍거나 전송하는 것이다.

송계범이 고안한 보류식 메커니즘은 오늘날 컴퓨터에서 표준 자판(두벌식)을 사용하여 한글을 입력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기계 장치가 완성된 글자를 기억했다가 별도의 인쇄 장치를 이용하여 찍어 내기 때문에 타자를 치는 사람은 글자꼴, 받침의 위치, 글쇠가 움직이는지 안 움직이는지 따위의 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자모를 순서대로 입력하기만 하면 되었다. 당시 타자기는 모두 세벌식 아니면 다섯벌식이었으므로, 두 벌의 글쇠만을 이용하여 한글을 입력할 수 있게 한 송계범의 발명은 많은 이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발명으로 1961년 3·1 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송계범의 인쇄 전신기는 대중화되기에는 너무 크고 복잡하며 비쌌다. 송계범도 신문 인터뷰에서 “(타자기가 스스로) 사고(思考)하려니까 돈이 꽤 들겠지요. 허나 영문 텔레타이프 값이나 맞먹으니까 국문 타이프라이터 값만이 절약된 셈입니다.”라며 비싼 가격이 문제라는 것을 에둘러 인정했다. 정부 기관에서는 송계범식 인쇄 전신기를 다량 구매하여 표준으로 삼았지만, 민간에서는 이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았다.

송계범이 고안한 두벌식 한글 입력 메커니즘이 일반에게 널리 쓰인 것은 컴퓨터와 전자 회로가 값싸게 보급된 30년 뒤의 일이다. 그의 발명은 시대를 너무 앞서 갔던 셈이다.

송계범은 제주도 출생으로, 일본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도쿄 물리 학교(도쿄 공업 대학의 전신) 이론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전남 대학교와 중앙 공업 연구소 등에서 활동했다. 뒷날에는 송(宋) 비즈니스 머신 회사를 차려 자신의 타자기를 알리고자 힘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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