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3. 한글의 기계화
  • 타자기에서 컴퓨터로
김태호

냉담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네벌식 표준 자판은 공무원 사회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표준 자판을 제정한 이후 공공 기관에서 새로 구매하는 타자기는 모두 표준 자판을 채택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자 교육 및 정부에서 주최하는 타자 대회도 표준 자판으로만 이루어졌으며, 공병우 타자기 등 다른 타자기의 옹호자들은 토론의 기회조차 봉쇄당했다.

하지만 네벌식 표준 자판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1983년 국무총리 훈령 제21호로 네벌식 표준 자판을 폐기하고, 기존의 인쇄 전신기 자판을 모태로 한 두벌식 자판을 새 표준 자판으로 공표하였다. 이는 전자 타자기와 개인용 컴퓨터(PC)가 보급되면서 크게 달라진 사무 환경을 반영한 조처였다. 내장된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는 컴퓨터에서는 두벌식으로 한글을 입력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므로,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자 두벌식 입력 방법도 폭넓게 확산될 수 있었다. 이에 과학기술처에서는 컴퓨터·전자 타자기·인쇄 전신기·기계식 타자기 등의 자판 통일을 위해 새 표준 자판을 발표한 것이다.

새 표준 타자기 자판은 오늘날의 표준 컴퓨터 자판과 거의 비슷하였다. 하지만 타자 동작으로 보면 두벌식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네벌식이다. 받침은 초성 자음의 윗글쇠에, 짧은 모음은 긴 모음의 윗글쇠에 배당되어 있어 시프트 키(shift key)를 누르고 입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자동 시프트 락(shift lock) 풀림 장치가 채택되어 있는 점이다. 받침이 있는 음절 글자를 칠 때는 모음을 치기 전에 시프트 락 글쇠를 누르고, 짧은 모음과 받침이 찍히고 나면 시프트 락이 해제되어 다시 초성 자음을 입력할 수 있도록 한 구조였다.

구조에 대한 설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두벌식 기계식 타자기는 상당 히 다루기 까다로웠다. 받침이 있는 음절 글자를 찍을 때마다 시프트 락 글쇠를 눌러야 했으므로 타자하기도 어려웠고, 손목에 많은 무리가 갔다. 자동 시프트 락 풀림 장치 같은 부품이 추가되었으므로 구조도 복잡해졌다. 글자꼴도 많은 비판을 받았던 네벌식 타자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새 표준 자판의 제정은 역설적으로 기계식 타자기 시장을 위축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이미 개인용 컴퓨터의 등장으로 입지가 좁아진 기계식 타자기는 표준 자판의 제정으로 설 자리가 더욱더 좁아졌다. 종래의 타자기 사용자들은 불편한 기계식 타자기를 버리고, 개인용 컴퓨터·전자 타자기·워드 프로세서 등 전자 회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장비로 빠르게 옮겨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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