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4. 반도체 신화
  • 경쟁과 행운의 결실
송성수

삼성은 첨단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면서 미국의 현지 법인이 핵심 기술을 개발하고 국내에서는 양산을 담당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그 러나 1M D램을 개발할 무렵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256K D램을 개발할 때 미국에 기술 연수를 다녀왔던 사람들이 귀국하면서 국내 연구팀이 1M D램을 직접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현지 법인과 국내 연구팀 중에 누가 기술 개발을 주도할 것인가를 놓고 상당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삼성은 1985년 9월에 현지 법인 팀과 국내 팀이 동시에 1M D램을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팀이 동시에 연구 개발에 착수하면 비용은 두 배로 들겠지만 성공할 확률은 더욱 높아질 수 있었다. 더구나 두 팀이 경쟁적으로 연구 개발을 추진하면 기간을 단축하는 효과도 기대되었다.

삼성은 1M D램의 개발에 착수하기 전인 1985년 2월부터 신제품을 개발할 때 공정 조건을 확립하기 위해 사용하는 시작(試作) 라인을 건설하여 같은 해 10월에 완공하였다. 64K D램과 256K D램을 개발할 때에는 기존의 생산 라인을 활용하였지만, M급 D램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시작 라인을 통해 시행착오의 극소화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삼성은 시작 라인을 건설하면서 공정 개발을 위한 웨이퍼 가공 시설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 컴퓨터 이용 설계(CAD) 시스템을 확충하여 회로 설계에 소요되는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게 하였다.

1M D램 개발팀은 제품 사양을 결정하는 단계부터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삼성은 그때까지 선진 업체의 샘플을 입수·분석하여 기술 흐름을 파악하고 이를 자사의 관련 자료와 비교·검토함으로써 최적의 제품 사양을 결정해 왔다. 그런데 1M D램의 시제품을 발표한 바 있는 미국과 일본의 업체들이 삼성에 샘플을 제공하는 것을 기피하기 시작하였다. M급 D램의 개발을 계기로 선진 업체들은 삼성을 본격적인 경쟁 상대로 인식했던 것이다.

선진 업체의 삼성에 대한 견제는 특허권 침해 소송으로 이어졌다. 1986년 2월에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exas Instruments)는 일본의 여덟 개 업체와 한국의 삼성이 자기 회사의 특허를 침해했다고 국제 무역 위 원회(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에 제소하였다. 그때 일본 업체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메모리 분야의 개량 특허를 근거로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에 대항하였다. 결국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와 일본의 업체들은 1987년 5월에 특허 사용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크로스라이센싱(cross-licensing)을 체결함으로써 화해를 도출할 수 있었다.

반면 삼성은 D램에 관한 특허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판결에서 패배하여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삼성은 기술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1M D램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기술 선택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 반도체 기술의 경향은 N-MOS에서 C-MOS로 이행하고 있었다. 반도체 회로를 설계하는 방식에는 전자의 흐름을 이용하는 N-MOS와 홀의 흐름을 이용하는 P-MOS가 있으며, C-MOS는 N-MOS와 P-MOS를 모두 사용하는 방식이다.

삼성은 처음에 기존의 방식을 따라 N-MOS 기술을 토대로 1M D램을 설계하였다. 그러나 1M D램부터 C-MOS를 채택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상당한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삼성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기술을 과감히 버리고 당시의 추세에 부응하여 C-MOS로 설계를 변형하였다. 이때 채택된 C-MOS는 이후의 제품에서도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삼성은 선도 업체들과의 기술 격차를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1M D램에 대한 국내 팀과 현지 법인 팀의 경쟁은 예상을 깨고 국내 팀의 승리로 끝났다. 국내 팀은 1M D램의 개발에 착수한 후 11개월 만인 1986년 7월에 양품을 생산했던 반면 현지 법인 팀은 이보다 4개월 뒤진 1986년 11월에 1M D램의 개발에 성공했던 것이다. 더구나 국내 팀이 개발한 제품의 성능이 현지 법인 팀에 비해 더욱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 팀은 기술적 측면에서도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1987년은 삼성에게 행운을 가져온 해였다. 사실상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상당 기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삼성은 1984년 9월부터 D램을 세계 시장에 수출하기 시작했지만 같은 해 말부터 공급 과잉으로 인한 불황이 닥쳤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의 업체들이 가격 덤핑을 시도했기 때문에 D램의 가격은 크게 폭락하였다. 처음 출하할 때 3달러였던 64K D램 가격이 1985년 8월에는 생산 원가인 1.7달러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30센트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더욱이 1986년에 삼성은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의 특허 제소로 9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이에 따라 1985∼1986년에 반도체 공장의 가동률은 30%에 지나지 않았고, 2년 동안 삼성이 입은 손실은 2000억 원에 달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삼성의 내외부에서 “반도체 산업에의 진입 시기를 잘못 택하지 않았나?” 또는 “반도체 산업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나?” 하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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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M D램의 해외 출하식
1M D램의 해외 출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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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태는 1985년 말에 미일 반도체 무역 협정에 의거하여 공정 거래 가격이 설정되고 일본이 생산량을 축소하면서 서서히 해소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1987년부터는 세계 경제가 활기를 되찾고 제2의 개인용 컴퓨터(PC) 붐이 일면서 256K D램을 중심으로 반도체 시장이 급속히 호전되었다. 당시에 일본과 미국의 업체들은 256K D램을 구형 제품으로 간주하 면서 1M D램의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삼성의 주력 제품이었던 256K D램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이다. 더욱이 미일 반도체 무역 협정으로 공정 거래 가격이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256K D램의 가격이 실질적으로 상승하는 효과까지 있었다. 이로 인해 삼성은 1987년을 계기로 3년 동안 누적된 적자를 말끔히 해소할 수 있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의 특허 제소 사건을 계기로 국내의 반도체 업체들은 독자적인 기술을 보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이에 삼성·현대·금성은 1986년 5월에 반도체 연구 조합을 결성한 후 정부에 공동 연구 개발 사업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1986년 7월부터 1989년 3월까지 추진된 4M D램 공동 연구 개발 사업에는 정부·한국 전자 통신 연구소(ETRI)·삼성·현대·금성의 공동 투자를 바탕으로 총 879억 원이 투입되었다. 국내 업체들은 4M D램을 공동으로 개발하기 위해 연구 개발 컨소시엄을 구성했으며, 선의의 경쟁을 통하여 당초의 목표를 달성했다. 4M D램 공동 연구 개발 사업은 참여 기업의 본격적인 연구 개발 활동을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삼성으로부터 현대와 금성으로 기술이 이전되는 효과도 낳았다. 이러한 국가 공동 연구 개발 사업은 16M·64M·256M D램을 개발할 때에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1990년대 이후에 현대 전자와 LG 반도체가 세계적인 반도체 업체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삼성이 4M D램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국내 팀과 현지 법인 팀의 경쟁이 있었다. 국내 팀의 1M D램 기술이 채택되자 현지 법인 팀은 크게 반발했고 이에 삼성의 경영진은 4M D램의 개발에서도 경쟁 체제를 적용했던 것이다.

현지 법인 팀이 다시 국내 팀에 뒤질 경우에는 향후에 D램 개발 사업을 맡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 조건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경쟁도 국내 팀의 승리로 끝났다. 두 팀은 모두 1986년 5월에 4M D램의 개발에 착수했지만 1988년 2월에 국내 팀이 먼저 양품을 생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에는 국 내에서 D램 개발을 전담하고 현지 법인은 D램 이외의 고부가 가치 제품을 담당하는 체제가 정착되었다. 국내 팀이 현지 법인 팀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현지 법인 팀의 연구원들은 반도체 분야에서 상당한 경험을 쌓은 40대의 전문가들이었던 반면, 국내 팀의 연구원들은 반도체에 눈을 뜨기 시작한 젊은이들이었다. 국내 팀은 전문성에서 뒤졌지만 패기와 성실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들은 1년 8개월 동안 밤낮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연구 개발에만 몰두하였다. 이처럼 국내 팀의 연구원들은 개인 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었기 때문에 현지 법인 팀에 승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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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하는 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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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M D램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또 한 번의 심각한 선택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1M D램까지는 칩의 평면만을 사용하는 플래너(planar) 방식으로도 필요한 셀을 충분히 만들 수 있었지만, 4M D램의 경우에는 평면 구조로는 부족하여 지하층을 더 만들든지 고층을 쌓아 올려야 했다. 지하층을 만 드는 트렌치(trench) 방식은 칩의 크기를 소형화할 수 있지만 공정이 길어 제작상의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반해 고층을 쌓아 올리는 스택(stack) 방식은 공정이 상대적으로 짧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지만 미세 가공이 곤란하고 칩의 면적을 축소하기 어려웠다. 당시에 IBM을 비롯한 미국 업체는 대부분 트렌치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고, 일본 업체의 경우에 도시바·NEC는 트렌치 방식을, 히타치·미츠비시·마츠시다는 스택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삼성은 처음에는 트렌치 방식으로 4M D램을 개발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우연한 기회에 트렌치 방식으로는 4M D램의 수축이 어렵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삼성 내부에서는 4M D램의 개발 방식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고, 이건희 회장은 두 가지 방식을 자세히 검토한 후 최종적으로 스택 방식을 채택했다. 스택 방식은 4M D램은 물론 이후의 제품에서도 기술 주류를 형성함으로써 트렌치 방식을 택한 업체들은 2군으로 밀려나고 스택 방식을 택한 업체들은 1군으로 성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국가 공동 연구 개발 사업에 참여했던 현대와 금성도 처음에 트렌치 방식을 선택했다가 삼성의 성공을 목격한 후에 스택 방식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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