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1. 자동차와 도로망의 발전
  • 새로운 탈것의 등장과 자동차의 도입
김명진

구한말에 인력거·서양 마차·자전거 같은 신식 탈것들이 등장했고, 레일 위를 달리는 운송 수단으로 전차와 기차가 선을 보였으며, 자동차는 육상 교통수단 중 가장 나중에 도입되었다. 인력거(人力車)는 1870년대 중반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1894년에 하나야마(花山)라는 일본인이 인력거 10대를 들여와 영업을 시작하면서 대중 교통수단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인력거는 그 편리함과 신속성으로 인해 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부산·평양 같은 대도시에서는 인력거 물결이 일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이어 1894년 갑오개혁을 전후해 수레 위에 상자 모양의 차체를 얹은 서양 마차가 나타났다. 처음 도입한 것은 황실이었으나 이후 대신이나 부호가 자가용으로 이용했고, 1900년대 들어서는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는 역마차 운송업이 시작되기도 했다. 자전거는 1890년대 초 프랑스 선교사와 독일 기술자들이 들여온 것으로 추정되며, 1890년 대 후반에는 완제품은 물론 부속품까지 이미 상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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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
인력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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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등장한 전차와 기차는 자동화 교통의 시작을 알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는 1899년 5월 서대문에서 청량리 사이의 구간에서 운행을 시작했는데, 고종이 친히 시승한 개통식에는 호기심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 종로는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같은 해 9월에는 인천 제물포에서 서울 노량진까지 33㎞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기차를 일컬어 ‘불을 뿜어내는 수레’라는 의미의 화륜차(火輪車)라고 부르며 신기해했다. 경인선 철도의 개통은 그 이전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던 서울과 인천 사이의 소요 시간을 두 시간으로 단축시켰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도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리지만, 국내의 공식 기록에 남아 있는 바로는 1903년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 기념행사인 칭경식(稱慶式) 때 어용(御用) 자동차 한 대를 들여온 것이 최초이다. 이 자동차가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졌고 어떤 형태와 기능을 가진 차였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주한 미국 공사였 던 호레이스 알렌(Herace Newton Allen)을 통해 이 차를 들여왔지만 도입이 늦어져 칭경식이 끝난 후에야 국내에 반입되었고, 그나마 운전수나 휘발유를 구하기 힘들어 제대로 한번 타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듬해인 1904년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일반 대중이 자동차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다시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였다. 1910년의 한일 병합 후 프랑스 영사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황실에 팔고 간 자동차를 순종이 타고 장안에 나타난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듬해에는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寺內)가 조선에 대한 무마 정책의 일부로 황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종과 자신을 위한 자동차를 각각 도입하도록 주선해 영국산 다임러가 고종 어용으로 들어왔고, 1913년에는 순종이 타기 위한 것으로 미국산 캐딜락을 들여왔다. 황실이나 고위급 정치인들의 전유물이던 자동차는 1915년 이후 부호·지주·사업가·선교사들에게도 조금씩 퍼져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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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御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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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御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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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영업용 자동차도 처음 등장했다. 1911년 말에 일본 상인 에가와(江川)가 승합차 한 대를 들여와 마산∼삼천포 구간을 네 개 노선으로 나누어 1912년 가을부터 여객 수송을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같은 해에 서울 시내에는 대절 택시가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이는 곤도라는 일본 청년의 즉흥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것이 상당히 수지맞는 장사임을 알게 된 그는 사업의 확장을 꾀하게 된다.

그는 일본인 사업가 오리이(織居加一), 조선인 자본가 이봉래와 힘을 합쳐 오리이 자동차 회사라는 최초의 운수 회사를 설립하고 전국적인 정기 노선 자동차 영업을 계획하였다. 총독부의 영업 허가가 늦게 나오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14년 오리이 자동차 회사는 모두 아홉 개 노선에 20대의 T형 포드를 투입해 영업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부족한 운전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성 운전수 양성소라는 최초의 자동차 학원이 생겨나기도 했다.

자동차의 수는 1915년 80여 대에서 1919년 200여 대, 1922년 800여 대로 크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이 중 절반 이상이 몰린 서울에서는 자동차와 인력거·마차·자전거·전차 등이 도로 위에서 뒤얽혀 큰 혼잡이 빚어졌고, 교통사고도 자주 발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독부는 1915년 7월 자동차와 자전거에 대한 최초의 단속법인 취체 규칙(取締規則)을 공포했다. 그 내용을 보면 경찰이 시행하는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해야 운전을 할 수 있게 했고, 자동차에는 번호판을 붙이게 하고 내부 구조도 규제했으며, 운전 중 기물을 파손하거나 인명을 살상하는 등의 사고를 낼 경우 면허를 취소하는 등 오늘날의 도로 교통법에 해당하는 사항들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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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버스
1930년대의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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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자동차 운수업이나 자동차 판매업은 모두 일본인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내 미국인과 조선인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치열한 경쟁이 생겨났다. 최초의 운수 회사였던 오리이 상회는 자동차의 수입·판매까지 겸하면서 1920년대 초까지 자동차 시장을 사실상 독점했으나, 1915년에 미국인 제임스 모리스(James Morris)가 세운 모리스 상회가 미국에서 당시 유행하던 윌리스 오버랜드(Willy’s Overland)·닷지(Dodge)·커닝엄(Cunningham) 등의 모델을 수입해 팔면서 오리이 상회를 누르고 자동차 판매업에서 1위로 올라섰다. 오리이 상회는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세루 상회, 구스모도 상회로 이어지면서 모리스 상회와 경쟁을 벌였고, 1933년에는 박용운이 경성 자동차 판매 회사를 차려 경쟁에 뛰어들었다. 자동차 운수업에서도 1915년 충남의 김갑순과 이종덕이 한 개 노선에서 두 대의 자동차로 사업을 시작해, 1928년 이후 충남 최대의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다.

한편, 일제는 한일 병합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자원 수탈과 군사적 목적을 위해 도로 개보수 사업을 계획하고 1907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만든 길을 신작로(新作路)라고 불렀는데, 최초의 신작로는 전주∼군산 46㎞ 구간에서 개통되었으며, 이는 기존의 오솔길을 단순히 넓힌 것이 아니라 구부러진 곳을 펴서 완전히 새로 뚫은 도로였다. 이후 신작로는 일제의 필요에 따라 경제·군사상의 주요 거점들 사이에 속속 개통되었다. 처음에 자갈길로 건설한 신작로가 포장도로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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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의 택시
1940년대의 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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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부터는 자동차 산업이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1922년에 정무묵·정형묵 형제가 경영하는 자동차 정비소가 생겼고, 뒤이어 자동차 부품을 수입해 판매하거나 자동차 수리를 해 주는 곳도 생겨났다. 1928년에는 일본인 에가와가 철판으로 유리 창문이 달린 자동차 지붕을 만들어 판매하는 차체 제조 공장을 만들었고, 1933년에는 구스모도가 일본에서 수입한 부품으로 포드 버스를 조립해 판매하는 조립 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이제 막 싹을 틔우던 산업화의 움직임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일 제가 전쟁 준비에 광분하면서 물자 공급을 억제함에 따라 고사하고 말았다. 1940년부터는 특별한 경우 외에 민수용 휘발유 배급이 전면 중단되면서 트럭·버스·택시 등 모든 민수용 차량을 목탄 가스를 이용하는 목탄차로 개조해 운행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빚어지기까지 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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