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1. 자동차와 도로망의 발전
  • 자동차 산업의 발전과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김명진

1960년대 후반은 외국 회사와의 기술 제휴를 통한 CKD 조립 생산으로 자동차 산업의 기반이 마련된 시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을 통해 흔히 국가 경제의 대동맥으로 불리는 고속도로망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때이기도 했다.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에서는 무엇보다도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1964년 12월 서독 방문에서 독일 부흥의 상징인 본과 쾰른 사이의 아우토반(Autobahn)을 시찰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이때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최초의 구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독에서 돌아온 그는 고속도로에 관한 자료 수집과 연구를 계속하였고, 대통령 선거 유세가 진행 중이던 1967년 4월에 경부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에 대해 당시 전문가들이나 야당·여론은 썩 우호적이지 않았다. 국제 부흥 개발 은행(IBRD)의 조사관들이 1966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도로 사정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긴 했지만, 대규모 고속도로 건설이 필요하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반대자들은 당시 경제 상황이나 차량 대수를 고려할 때 경부 고속도로 건설은 시급한 과제가 아니며, 재정적으로도 현명한 결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확대보기
경부 고속도로 건설 현장
경부 고속도로 건설 현장
팝업창 닫기

실제로 1967년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차량 대수는 6만 대에 불과했으며, 1969년까지 도로 포장률은 8%밖에 못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는 고속도로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토목 공학 같은 기술적 능력에서도 대규모 고속도로를 건설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확대보기
서울-대전 고속도로 개통 기념 아치
서울-대전 고속도로 개통 기념 아치
팝업창 닫기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을 강행했다. 그는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던 당시 상황을 이용해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을 북한과의 경쟁과 남북통일에 연결시켰다. 이에 따라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은 단순히 조국 근대화의 중요한 사업으로서뿐 아니라, 북한과의 체제 경쟁 측면에서도 중요한 과업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 공사는 1968년 2월에 착공되었는데, IBRD가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차관 제공을 거부했기 때문에 경부 고속도로는 ‘우리의 기술과 우리의 자금으로’ 건설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총 연장 430㎞인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에는 2년 5개월의 시간과 430억 원의 공사비가 소요되었는데, 이는 외국의 사례와 비교했을 때에도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저렴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노선 선정과 설계, 토지 매입, 공사 일정 관리, 자금 조달, 인력 동원 등 건설 과정의 전 단계에 직접 관여했으며, 1970년 7월에 경부 고속도로가 완공된 이후 많은 관계자가 이를 두고 ‘박 대통령의 걸작품’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확대보기
완공된 경부 고속도로
완공된 경부 고속도로
팝업창 닫기

그러나 미리 정해진 일정을 맞추기 위하여 군대가 적을 향해 돌격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돌관 공사(突貫工事)는 숱한 문제점을 낳기도 했다. 군에서 차출된 공사 현장 감독들은 잦은 초과 작업과 철야 근무로 인부들을 압박했고, 무리한 공사 진행은 잇단 사고를 불러 77명의 생명을 앗아 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예산 제약으로 인해 도로의 너비, 포장 두께가 불충분하게 설계되어 개통 직후부터 노면 파손, 노반이나 축대 붕괴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고 이에 대한 보수 공사가 쉴 사이 없이 계속되어야 했다.

이 때문에 1980년대가 되면 경부 고속도로는 불과 10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설계·건설된 누더기 고속도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은 1970년대 이후 속속 건설된 대규모 고속도로들이 모방하고 개선시킬 수 있는 하나의 전례를 제공 했고, 우리나라의 교통 체계와 수송 분담률이 철도 위주에서 도로 교통 중심으로 옮겨가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개통 초기에 매일 2만 대에도 못 미치던 교통량은 1977년 3만 대를 넘어선 이후, 국내 자동차 보유 대수 증가와 함께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또한 1971년 말까지는 자가용 승용차의 숫자가 화물차보다 많아서 관광 도로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으나, 이후 고속도로망이 확충되고 트럭 화물의 비중이 커지면서 명실상부한 국가 경제의 대동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확대보기
경부 고속도로 교통량 측정
경부 고속도로 교통량 측정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