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1. 자동차와 도로망의 발전
  • 자동차 산업의 성숙과 마이카 시대의 명암
김명진

1970년대 후반에 생산과 수출의 빠른 증가로 호황을 구가하던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1979년의 제2차 유류 파동(oil shock)을 계기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휘발유 소비를 줄이기 위해 차량 등록세 신설, 자동차세 인상 등의 조치가 취해지자 국내 자동차 수요가 위축되었고, 1977년 8만 4000대에서 1979년 20만 2000대로 급증했던 생산 대수는 1981년 12만 8000대로 크게 감소했다. 이에 따라 자동차 산업은 공장 가동률이 평균 30%대로 떨어지는 극심한 침체에 시달리게 되었다.

새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업종별 전문화를 추진하는 이른바 중화학 공업 투자 조정이라는 합리화 방안을 단행하였다. 1980년 8월에 발표된 1차 통합 조치안은 현대와 새한이 통합해 승용차를 생산하고 기아는 소형 트럭을 생산하도록 전문화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새한의 지분 50%를 갖고 있던 미국 제너럴 모터스(GM)와 현대의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결국 1981년 2월에 발표된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일명 2·28 조치)에서는 승용차 생산을 현대와 새한으로 이원화하고 기아는 소형 트럭 생산에 특화하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강제적 통폐합 조치로 인해 기존 자동차 회사들은 큰 재정적 손실을 감수하고 보유하고 있던 생산 설비와 부품 중 일부를 헐값에 처분하는 등의 구조 조정을 단행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일부 회사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3년 이후 자동차 산업은 정부의 경기 부양책과 자구 노력에 힘입어 다시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현대 자동차는 1982년에 포니2, 1983년에 제2의 고유 모델인 중형 승용차 스텔라를 각각 출시하고, 캐나다에 현지 법인을 설립해 북미 시장에 대한 진출을 모색했다. 이어 1981년에 시작된 전륜 구동형(前輪驅動型) 신차 개발 계획인 X-카 프로젝트가 1985년 엑셀과 프레스토의 개발로 결실을 맺으면서 이듬해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하게 된다. 현대는 진출 첫해인 1986년에 20만 3000대라는 놀라운 판매 실적을 기록하면서 언론의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고, 30년 가까이 깨지지 않고 있던 미국 첫해 수입차 판매량 1위 기록을 경신하는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

현대는 1988년에 전륜 구동형 중형 승용차인 쏘나타를 출시하면서 수출뿐 아니라 내수 시장에서도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했다.

새한 자동차는 대우 그룹으로 경영권이 넘어가 1983년 대우 자동차로 이름을 바꾼 후, 1986년 GM의 자회사인 독일 오펠의 카데트 모델에 기초한 전륜 구동형 르망을 개발해 이듬해부터 주문자 상표 부착(OEM) 방식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대우 조선을 모체로 한 대우 국민차는 1991년 국민차 공장을 준공해 일본 스즈키의 알토를 기본 모델로 한 800㏄급 티코를 출시함으로써 국내에서 경승용차 시대를 열었다. 2·28 조치 이후 승용차 생산을 하지 못하게 된 기아 산업은 한때 존폐의 위기를 맞았으 나, 1981년 말 디젤 엔진을 탑재한 12인승 봉고 승합차를 출시해 봉고 신화를 만들어내면서 회생했다. 봉고는 처음 3년 동안 트럭과 승합차를 합쳐 12만 대가 팔려나가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986년에 합리화 조치가 사실상 해제되자 기아는 일본 마츠다의 페스티바를 기본 모델로 한 프라이드를 출시해 다시 승용차 생산에 뛰어들었고, OEM 방식으로 미국 수출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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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적을 기다리는 수출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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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동차 3사의 경쟁이 다시금 치열해지면서 자동차 생산과 수출은 더욱 활기를 띠었고 1987년에는 자동차 수출이 50만 대를 넘어섰다. 1989년 1월에는 현대가 단일 차종인 엑셀 수출 100만 대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아울러 1980년대 후반부터는 급격한 수출 증대와 함께 고유 모델과 기술 개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자동차 회사들의 연구 개발(R&D) 투자가 크게 늘어났다.

현대에 이어 1989년부터는 쌍용·대우·기아가 차례로 고유 모델을 개발해 시판에 들어갔고, 1991년 현대는 5년여의 연구 개발 끝에 알파(α) 엔진을 자체적으로 개발했다. 1994년 현대는 자체 설계한 엔진을 탑재한 100% 독자 기술의 악센트를 출시함으로써 개발도상국에서 처음으로 독자 모델의 단계로 진입한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2004년 시점에서 우리나라는 346만 9000대를 생산한 세계 6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다.

자동차 산업의 성숙과 함께 국민 경제가 성장하면서 1985년에는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가 100만 대를 넘어섰다. 자동차 내수 시장은 이른바 3저 호황(三低好況)의 물결을 타고 1987년부터 급격히 커지기 시작해 매년 30∼40%라는 놀라운 증가세를 보이게 된다. 1980년대 중반의 한 자동차 광고에 나타난 ‘하루 1200원씩 절약해 마이카를 마련했습니다.’라는 문구는 자동차 대중화의 시대로 막 접어들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이와 같은 내수 시장의 증대에는 자동차 회사들이 매년 새로운 모델을 내놓아 구매 욕구를 자극한 것, 대량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공급 물량이 확대되고 자동차 가격이 떨어진 것, 자동차에 대한 특별 소비세와 유가가 하락한 것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1990년에는 차량 등록 대수가 330만 대를 돌파했고 이후 해마다 평균 100만 대씩 늘어나면서 본격적으로 마이카 시대에 접어들었다.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는 1997년 1000만 대를 돌파했는데, 이 중 724만 대가 승용차로 전체 가구 중 54%가 자가용을 보유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마이카 시대의 도래는 서구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공간 구조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일례로 서울 인근 수도권 지역에 신도시 개발이 잇따라 추진되고 있는 것은 같은 시기에 불어 닥친 마이카 열풍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런 지역에 거주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곧 출퇴근·쇼핑·등교 등에 자가용 승용차를 통한 이동 능력의 확보를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동 능력의 증가는 기차 등의 대중 교통수단에 의존하던 이전까지의 여가 생활 방식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레 저용 가이드북은 직접 차를 몰아 원하는 곳을 찾아나서는 운전자 위주로 바뀌었고, 자동차로 접근이 가능하고 주차가 쉬운 곳을 중심으로 관광지와 상권이 재편되는 양상도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와 아울러 마이카 시대에 수반된 심각한 문제점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몇몇 대도시의 경우 이미 1980년대 초에 교통량 증가 현상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는데,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자가용 승용차가 급증하면서 교통 체증이 더욱 심해졌다. 서울에서 차량의 평균 이동 속도는 1986년의 시간당 25.1㎞에서 1990년에는 16.1㎞로 크게 떨어졌고, 1990년대 초가 되면 도심의 교통 정체와 주차난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다. 아울러 자동차 수의 증가에 따라 늘어나는 교통사고와 인명 피해가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었고, 자동차 배기가스가 야기하는 대기 오염의 심각성도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대기 중의 미세 먼지나 오존(O₃)량의 증가로 인한 호흡기 질환의 보편화가 새로운 공공 보건상의 문제로 등장했다. 서구 사회가 이미 수십 년 전에 겪었던 것처럼, 마이카 시대는 이동 능력 확보에 따른 편리함과 아울러 사회적·환경적 대가까지도 함께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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