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2. 커뮤니케이션 지평의 확장
  •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의 등장과 변모
  • 라디오 방송
김명진

우리나라에서의 라디오 방송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가 방송국 설립을 계획하여 총독부 체신국에서 1924년 11월부터 정기적인 시험 방송 을 시작한 것이 최초이다. 이후 『조선일보』나 『전북일보』 같은 민간단체들이 방송에 관심을 보이면서 각각 시험 방송을 실시했다. 이러한 시험 방송을 통해 방송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지자, 1926년 11월에 11개 민간단체가 연합해 사단 법인 경성 방송국을 설립하고 일제로부터 방송 무선 전화 시설 인가를 받았다. 일제는 1지역 1기업이라는 원칙을 내세워 복수의 방송국이 설립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는데, 표면상으로는 방송 사업 보호라는 구실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방송에 대한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경성 방송국은 1927년 2월 16일, 호출 부호 JDOK, 출력 1㎾로 첫 방송을 시작했다. 경성 방송국은 처음에 하나의 주파수로 한국어와 일본어 방송을 동시에 하는 방식을 채택했고, 한국어 방송과 일본어 방송의 시간 비율은 3대 7 정도였다. 방송의 내용은 경제 시황 보도·물가 시세·일기 예보·공지 사항 등 주로 재한(在韓) 일본인의 경제 활동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고, 순수한 한국어 방송으로는 창·민요·동화·고담(古談)·스포츠 중계·방송극과 같은 오락 프로그램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청취자들이 방송을 시청하기 위해서는 수신기를 방송국에 등록한 후에 월 2원의 수신료를 납부해야 했는데, 수신기 가격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조선인의 수신기 소유 대수는 극히 적었고 대부분이 일본인 소유였다. 일례로 개국 직후인 1927년 2월에 청취자 계약을 신청한 사람은 1440명이었으나 우리나라 사람은 275명에 불과했고, 1929년에는 청취자 수가 1만 226명으로 늘었지만 조선인 청취자는 1000명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수신기의 보급 저조로 경영난에 시달려 온 경성 방송국은 1932년 조선 방송 협회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고, 1933년부터 한국어 방송과 일본어 방송을 따로 하는 이중 방송을 실시하고 출력을 10㎾로 증가시켜 청취자 수의 증대를 꾀했다. 또한 1935년의 부산 방송국 개국을 계기로 기존의 경성 방송국이 경성 중앙 방송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평양·청진·이리·함 흥 등지에 지방 방송국들이 생겨나 점차 전국 방송망의 틀이 갖추어졌다. 이는 저렴해진 수신기의 보급과 함께 조선인 청취자의 증가를 가져왔다. 1933년 말에 일본인 등록 대수 2만 3682대, 조선인 등록 대수 5639대로 모두 2만 9321대였던 수신기 대수는 1935년 말에 5만 3098대로 증가하더니, 1937년 10월 말에는 10만 대를 넘어섰고, 1939년 3월 말에는 16만 7000대로 늘어났다. 이 중 조선인의 등록 대수는 7만 8000대로서 일본인 등록 대수 8만 8000대에 육박했고, 1941년 3월 말에는 조선인 수신기 등록이 더욱 늘어나 전체 22만 4000대 가운데 11만 5000대를 차지하여 일본인의 10만 6000대를 능가하게 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한국어 방송의 내용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1942년부터는 한국어 방송을 단절시키고 일본어 방송과 통합했다. 한국어 방송이 단절되자 조선인들은 단파를 통하여 해외에서 송출하는 방송을 청취하였다. 1944년에 접어들어 패전의 기운이 짙어지고 이 소식이 해외 단파를 통해 계속 조선인들에게 전해지자 일제는 조선인의 단파 수신기 소지를 단속하여 외부로부터의 소식을 차단하려는 광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1945년 광복을 맞은 후 방송국은 미군정 공보부 산하로 이관되었으나 정부 수립 후 방송 사업이 국영화되어 서울 중앙 방송국과 10개 지방 방송국이 공보처로 흡수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중앙 방송국은 대전·부산·대구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 비정규적으로 방송을 계속했고, 1953년 휴전 후 다시 서울로 복귀했다. 1950년대는 방송 시간이 점차 늘고 해외 방송을 시작하는 등 라디오 방송이 발전해 갔던 시기였다. 아울러 1954년에는 최초의 민영 방송인 기독교 방송(CBS)이 탄생하였다. CBS는 음악 방송과 선교 방송을 주 내용으로 했는데, 클래식과 팝송 등을 소개하는 음악 방송의 비중이 높아 청취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이어 1956년에 극동 방송, 1959년에 최초의 민간 상업 방송인 부산 문화 방송이 개국했고, 1961 년에는 부산 문화 방송이 서울로 진출해 최초의 중앙 민간 상업 방송인 한국 문화 방송(MBC)이 창립되었다. 이로써 독점 사업으로 황금기를 구가하던 국영 방송 시대는 막을 내리고 국·민영 경쟁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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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는 민영 방송이 본격적으로 성장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다. 1963년에 동아 방송(DBS), 1964년에는 동양 방송의 전신인 라디오 서울(RSB)이 새로 개국하여 광고 수입 확보를 위한 민영 방송 3사(MBC·DBS·RSB) 간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영역은 라디오 연속극으로, 당시 라디오 연속극의 인기는 오늘날의 텔레비전 드라마의 인기 못지않은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저녁 이후의 황금 시간대에 거의 모든 라디오 채널에서 매 시간마다 연속극을 편성했고, 1년에 방송되는 연속극의 총수가 150여 편에 달할 정도였다. 라디오는 1960년대 말까지 가장 중요하고 인기 있는 대중 매체였으나, 1970년대 이후 그 영향력을 점차 텔레비전에 넘겨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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