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2. 커뮤니케이션 지평의 확장
  •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의 등장과 변모
  • 텔레비전 방송
김명진

우리나라의 텔레비전 방송은 1956년 매우 즉흥적이고 우연한 계기에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의 전자 통신 회사인 RCA의 한국 대리점을 운영하던 황태영(黃泰永)이 KBS에 납품할 라디오 기자재 도입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기자재 구매에 대한 커미션을 현금이 아닌 텔레비전 방송 기자재로 받기로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는 이 기자재를 바탕으로 RCA와 합작을 하여 민영 텔레비전 방송국을 차릴 계획을 세웠고, 우여곡절 끝에 정부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아 한국 RCA 배급 회사(KORCAD)를 설립함으로써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인 HLKZ-TV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7년까지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 대수는 200∼300대에 불과했기 때문에 상업 방송을 지탱해 줄 광고 수입을 얻을 만한 기반이 구축되어 있지 못했다. 또한 프로그램 편성에 있어서도 취재 설비 등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미국에서 제공한 뉴스나 영화 등에 크게 의존하였고, 국내에서 제작된 프로그램 역시 미국의 프로그램을 베낀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렇듯 무모하게 출발한 KORCAD는 1년도 채 못 되어 경영난에 직면해 운영권은 당시 『한국일보』 사장이었던 장기영(張基榮)에게 넘어갔다. 회사를 인수한 장기영은 방송국 이름을 대한 방송 주식회사로 바꾸고 직접 사장으로 취임해 상업 방송의 틀을 갖추어 나갔으나 1959년 초 불의의 화재로 방송이 중단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이후 HLKZ-TV는 AFKN의 채널을 매일 30분씩 임대하는 방식으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1961년 10월 군사 정부의 개입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확대보기
흑백 텔레비전
흑백 텔레비전
팝업창 닫기

HLKZ-TV는 원칙이 없고 졸속적이었던 당시의 방송 정책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으나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으로 이후 텔레비전 방송의 제도·기술 방식·편성·프로그램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후 텔레비전 방송은 관영 방송의 형태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군사 정부는 자신들이 일으킨 군사 정변의 합리화를 위한 선전 도구로 텔레비전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텔레비전 방송국의 조속한 개국을 추진했고, 1961년 12월 서울 텔레비전 방송국(현 KBS-TV)을 설립해 서울·경기 일원에 텔레비전 방송을 재개했다. 이어 1964년 12월 동양 방송이 서울과 부산에 TBC-TV를, 1969년 8월에는 문화 방송이 서울에 MBC-TV를 각각 개국하여 3국 텔레비전 시대가 열렸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국내에서 생산된 텔레비전 수상기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보급되면서 1973년에 수상기 보급이 100만 대를 넘어섰고, 텔레비전은 라디오를 제치고 가장 중요한 대중 매체로 자리를 잡았다. 이는 매체별로 비교한 광고비에서도 알 수 있는데, 1970년만 해도 텔레비전 광고비는 라디오의 광고비에도 못 미쳤고 신문 광고비의 3분의 1에 불과하였지만, 1974년이 되면 신문 광고비를 능가하면서 가장 효율적인 광고 매체로 부상하게 된다.

텔레비전은 1970년대 이후 대중문화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로 떠올랐다. 그러나 시청률을 의식한 텔레비전 3사 사이의 치열한 경쟁으로 말미암아 텔레비전 방송은 말초적 흥미를 유발하는 프로그램으로 대중문화를 저질화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외부로부터의 규제로 무더기 방송 중단 사태를 빚기까지 했다. KBS·TBC·MBC의 편성 경쟁은 일일 연속극·코미디·쇼 프로그램 등에서 치열했는데, 특히 라디오 연속극의 인기를 이어받은 텔레비전 일일 연속극의 경우 방송사마다 매일 5편의 연속극을 내보낼 정도의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이러한 방송사 간의 경쟁은 1980년의 언론 통폐합 직전까지 이어졌다.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1970년대 초부터 여러 차례 계획이 제출되었지만, 기자재 수입으로 인한 무역 역조를 우려한 상공부의 반대, 컬러텔레비전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언론의 논조, 박정희 대통령의 반대, 때마침 불어 닥친 제2차 유류 파동 등으로 인해 도입이 번번이 유보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는 세계 주요 방송사 중 우리나라만 흑백 방송을 하고 있었으며, 가전 업계에서는 이미 컬러텔레비전을 생산해 수출까지 하고 있던 시점이어서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더 이상 미루기는 어려웠다. 이에 12·12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1980년 8월부터 컬러텔레비전 시판을 허용했고, 1981년 1월 1일부터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 었다.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프로 야구 중계·대형 쇼·코미디 같은 오락 프로그램이나 대형 특집·교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등을 통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확대보기
금산 위성 통신 지구국
금산 위성 통신 지구국
팝업창 닫기

1990년대부터는 채널의 다양화와 방송 기술의 향상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1991년 12월에는 새로운 민영 방송인 서울 방송(SBS)이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고, 1995년 1월에는 케이블 텔레비전이 30여 개의 채널을 시작으로 방송을 개시하였으며, 1996년 7월부터는 국내 위성 방송의 시험방송을 실시하여 명실상부한 다채널·다매체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2000년 9월에는 SBS-TV가 디지털 시험 방송을 시작하였고, 2001년부터는 고선명 텔레비전(HDTV)의 시범 방송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1970년 6월 충남 금산에 최초로 위성 통신 지구국을 설립하여 국제 통신 중계를 시작했다. 문화 및 산업 발전에 따라 인공위성의 필요성이 점차 늘어나자 한국 전기 통신 연구소는 1983년 국내 통신 방송 위성 시스템 타당성 연구에 들어갔고, 이 연구를 토대로 정부는 1989년 12월 무궁화 위성 사업 계획을 확정하고, 1990년 7월 한국 통신에 위성 사업단을 발족시켜 본격적으로 위성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로 1995년 8월 5일에 미국 플로리다 주 케이프 캐너베럴 공군 기지에서 국내 최초의 통신 방송 위성 무궁화 1호를 발사하였고, 이어 1996년과 1999년에 각각 무궁화 2호와 3호를 쏘아 올렸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 스물두 번째 상용 위성 보유국이 되어 위성을 통한 디지털 방송 및 초고속 데이터 통신 서비스를 독자적으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