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3. 과학 기술,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다
  • 가정용 기기의 발달과 여성
박진희

우리나라에서 가전제품이 확산되는 과정을 연구한 학자들은 이들 기기 보급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전자 공업의 발달을 든다. 1960년대부터 수출 전략 산업으로 육성한 전자 공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가전제품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가정에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가전제품이 개발되어 온 추세를 들여다보면, 이것을 사용하는 주부들의 욕구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발전해 왔음을 알게 된다.

기기 사용에서 주부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노동 절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전기청소기나 식기 세척기는 가장 먼저 개발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국내에서 개발된 순위로 보면 가장 늦었다. 1975년 조사에서 주부들이 일차적으로 구입하고 싶어하는 가정 기기는 세탁기가 30%, 냉장고가 7%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노동 절약적 특성 때문에 주부들의 요구가 높았던 세탁기는 냉장고보다 늦게 개발되었다. 제품의 개발 순위가 노동 절약적 요구나 필요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은 기기 생산의 측면에서 주부들의 요구가 반영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성이 주로 쓰는 가전 기기가 실제 사용자의 요구와는 무관하게 발달해 왔다는 것이다.

가정용 기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부들의 노동을 대체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주부들은 이런 노동 대체 효과에 기대어 가정용 기기를 수용해 왔다. 가정용 기기 확산 시점과 식모(食母)로 불리던 가정 고용인이 감소하던 시점이 대체로 일치하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1960년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더불어 경공업 산업이 발전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중산층 가정의 식모로 일하던 여성들이 공장의 직공으로 옮겨 가게 된다. 이런 인력 이동 이외에 전근대적인 산물로서 식모 제도에 대한 비판들이 높아지면서, 1970년대 말이 되면 직업으로서 식모는 사라지게 된다. 한편, 가정용 기기 생산자들은 이들이 식모의 노동을 대신하는 일꾼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켜 갔다. “식모가 없는 대신 시간제 가정부가 생길 것이고 가정부가 없으면 전기 기구가 살림을 할 것이다.”는 한 여성지의 문구는 당시 생산자들의 광고 전략을 잘 드러내 준다. 당장 식모가 하던 허드렛일을 맡아야 할 처지에 놓인 주부들에게 이런 일들을 도맡아 줄 가정용 기기는 필수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식모를 부리는 것이 과거 안주인의 역할이었다면 현대 주부는 자동화된 전기 기기를 쓸 줄 아는 사람으로 변신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주부상은 1960년대 말부터 새롭게 주장되고 있던 현대의 여성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여성은 가사 노동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한편, 가정의 소비 경제를 모두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노동 현장에서처럼 발달된 도구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만 한다. 1960년에 발간된 『가정』이라는 여성 잡지에는 “기계를 이용함으로써 사람의 힘을 덜고 많은 성과를 짧은 시간에 거둘 수 있다. 이런 가정 기계는 전력 관계상 무조건 장려하기는 곤란하나, 가능한 다른 소비재를 절약하고라도 설비하는 것이 가정 노동의 합리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하는 글이 나온다. 이런 새로운 주부상은 실제로 주부가 기기를 구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 주부는 잡지 기사에 식모의 도움 대신 기계를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에 전기용품을 구입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주부들이 믿고 있던 노동 경감이 실제 일어났던 것일까? 세탁기를 쓰게 되면서 무거운 이불 빨래에 들어가는 육체적 노동은 줄어들었지만 빨래의 간편함은 한편으로 청결에 대한 일반 관념까지 바꾸어 놓았다. 과거에는 한 달에 한 번 빨래하면 되었던 것이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으로 빈도수가 증가해 버린 것이다. 결국 주부들의 노동 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빨래와 같은 가사 노동은 여전히 주부의 몫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고하게 작용하는 가운데 증가하는 가족의 청결 욕구는 고스란히 주부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되어버렸다.

가정 기기는 일차적으로 주부의 가사 노동을 좀 더 편리하고 쉬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주부는 더 이상 불을 지피고 음식을 보관하고 식품을 찧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힘들여 빨래하고 숯을 피워 다리미질하는 일, 손으로 옷을 짓는 일, 각 방마다 불을 피우고 물을 데우는 일, 힘들여 걸레질하는 일도 사라졌다. 그러나 가정 기기는 가족의 생활 표준을 변화시키고 욕구를 증대시킴으로써 주부가 가사 노동을 하는 빈도와 양을 증가시켰다. 게다가 가정 기기로 말미암아 늘어난 주부의 심리적 부담을 증가시키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가정 기기는 특정 노동 과정에서 가사 노동의 편리성을 높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주부의 가사 노동 빈도와 양을 증가시키고 정서적 부담을 늘렸던 것이다.

서구의 경우에는 여성의 경제 활동이 늘어나면서 가정용 기기의 보급이 크게 증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가사 노동 경감이 필요한 사람들이 가정용 기기를 사용하여 취업 여성들에게 노동 경감의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1960년대에 상대적으로 값이 비쌌던 전기 제품은 대개 식모를 두고 직업을 갖지 않은 상류층 주부가 신분을 과시하려고 소비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전기 제품의 소비는 중류층 가정으로 확대되었으나 이들 가정의 주부도 대부분 전업 주부들이었다. 이들은 식모를 대신하는 일꾼으로, 노동 대체 상품으로 기기를 구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앞서와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시간 절약이나 노동 경감에 대한 욕구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정작 기기를 구입하기 원하던 대다수의 취업 여성들은 저소득층에 속하던 이들이었다. 장시간의 공장 노동에 지친 이들 은 여전히 구식 아궁이와 빨래판에 의지해야만 하였다. 이들 취업 여성들의 노동 경감이 가능해진 것은 최근에 와서이다. 여기에는 여성 임금 소득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는 것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서구에서의 가정용 기기 보급은 여성의 공적 활동 증가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가정용 기기를 중산층 주부들이 전유(專有)하면서 노동을 대신해 주는 상품으로서보다는 ‘현대적 감각의 주부’의 상징으로 소비되어 온 측면이 컸다. 이런 점은 1970년대 식모를 대신한 일꾼으로서의 이미지가 1980∼1990년대 광고에서 사라지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부들의 미적 감각을 발휘하는 대상으로서, 거기에 첨단 기술 제품 이미지가 한층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기기들은 오로지 주부에게만, 즉 전업 주부의 소유물이자 전업 주부의 상징으로 작용하면서, 가사 노동에서의 해방이라는 이미지는 어느새 자취도 없어졌다.

가정 기기는 전자 공업의 발달, 소득 향상, 기회비용의 상승이라는 조건 아래서 증가하는 서비스 가격과 감소하는 가정 고용인을 대신하여 주부의 효율을 증가시키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러나 가정 기기는 주부의 가사 노동 효율보다는 과시적 욕구나 소유욕의 충족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가정 기기가 저소득층 취업 주부의 시간 제약과 그 해결책이 되는 데도 제한이 있었다.

가정 기기가 주부 한 사람에 의한 가사 노동 수행을 강화시켰다는 점에서, 주부가 하는 가사 노동의 효율을 증가시키는 기능을 하였다고 볼 수 없다. 게다가 생산 과정에서 주부의 노동 절약에 대한 요구는 크게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정 기기는 일차적으로 주부의 가사 노동 효율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여기곤 하지만, 주부의 가사 노동 효율과는 무관하게 도입되고 사용된 측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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