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1장 죽음이란 무엇인가?
  • 3. 끝나지 않은 여정
주강현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지리적 단절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삶의 섭리라는 면에서 볼 때는 인과론적 고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적어도 저승과 이승이 무관하면서도 상관이 있는 땅, 즉 저승살이와 이승살이는 상호 순환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죽은 자가 다시 돌아오는 환생(還生)은 저승과 이승이 단절적이지 않다는 것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① 호중(湖中)에 한 선비가 있었는데, 매제가 온 지 사흘 만에 병들어 죽었다. 누이를 사돈댁으로 보내면서 슬픔을 참지 못해 부(賦)를 읊었다. 글을 관 앞에 놓자 무지개가 강에서 관까지 뻗치더니 죽은 사람이 환생하였다.16)『계서야담(谿西野談)』 호중고유일사(湖中古有一士) ; 『청구야담(靑丘野談)』 기사인임강애만(起死人臨江哀輓).

② 경주 사람인 남모(南某)가 봉산 둔감(鳳山芚監)으로 있었다. 하루는 타작마당에서 한 총각이 범인(凡人)이 아님을 알고 사연을 물었더니, 그 총각이 흉년을 만나 가족을 잃고 봉산 땅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남모가 그 총각을 양반집에 장가들이고 논을 주었다. 남모가 병이 들어 위중하다가 갑자기 일어나서는, 잠시 전에 두 귀졸(鬼卒)이 나타나서 자신을 관부로 끌고 갔는데 그곳의 한 관원이 총각의 조부로서 손자에게 덕을 베풀어 준 대가 로 수명을 연장시켜 주겠노라고 하여 살아났다고 하였다.17)『청구야담』 시음덕남사연명(施陰德南士延命).

③ 선비 오준(吳浚)은 효성이 지극하여 상을 당하자 묘 곁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오가 나이 40에 죽었는데 가슴에 온기가 조금 있어 염하지 않았더니 하루 만에 되살아났다. 염라대왕이 오가 불효자 대신에 잘못 잡혀왔으므로 오의 수명은 80이라 하면서 되돌려 보낸 것이다.18)『동야휘집(東野彙輯)』 효자환생설명부(孝子還生說冥府). 이와 비슷하게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자손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진다(『기문총화(記聞叢話)』).

④ 감사 정효성이 화순 현감이었을 때 병에 걸려 죽었다가 다시 깨어났으니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갔던 것이다. 공이 저승길에서 나오는 길에 무당이 주는 술을 마셨는데 그 뒤 무당 일을 잘 하였고 혼을 불러오기도 하였다.19)『동야휘집』 당헌청희피곤욕(棠軒請戲被困辱). 말미에 이르길, 무당의 일이 본래 사람을 미혹하는 것인데, 정공이 귀신을 접한 것은 괴이쩍다고 하였다.

⑤ 한 재상이 어릴 때부터 매년 꿈에 한 촌가에 이르러 제사를 받았는데 그때마다 한 부인이 음식을 차려 놓고 애통해하였다. 재상이 마음속으로 늘 의아해하던 중 나이 서른에 평안 감사로 부임해서 다시 제사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 집이 관영 뒷문에서 멀지 않은 초가였다. 감사가 꿈에서 깨어나 그 집을 찾아가 본즉, 꿈속에서 본 집에 노파가 제사를 지내고 있으므로 사정을 물어보았다. 노파는 본래 기생으로 젊어서 매우 총명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이 통인으로 일하다가 평안 감사의 위엄을 보고 자기는 감사가 될 수 없음을 비관하여 앓다가 죽었는데 이제 30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감사는 자기가 그 죽은 아이의 후신임을 알고 노파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 일이 세상에 누설되지 않았지만 이를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 감사는 노파를 친어미처럼 효성스럽게 받들었다고 한다.20)『금계필담(錦谿筆談)』 유일재(有一宰). 말미에 이르길, “이로 미루어 보면 불교의 이른바 윤회설과 환생설이 거짓은 아니라고 하겠다.”고 하였다.

②의 경우처럼 조상의 음덕 덕분에, ③의 경우처럼 효행 덕분에 환생하고는 한다. 이는 평소에 공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저승행은 정해진 명단이 있는 것이므로 ④의 예처럼 오인되어 저승으로 불려가기도 하고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아예 ⑤의 경우처럼 전생의 연을 이어받아 후생에 새롭게 태어나기도 한다. 이같이 각각의 사정이 다르게 나타 나기는 하나 공통점은 이승과 저승을 오가면서 환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 「선율환생(善律還生)」에서 보듯이, 저승은 일부 특수한 사람에게는 내왕이 가능한 곳으로 보았다. 이러한 저승 내왕 이야기는 이른바 반혼(返魂)으로 일컬어지는데, 조선시대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수록된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와 작자 미상의 『왕랑반혼전(王郞返魂傳)』, 『삼사횡입황천기(三士橫入黃泉記)』 등의 문학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남염부주지」는 김시습의 생사관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경주에 살고 있는 유학자 박 서생은 어느 날 꿈에 남쪽 염주부(염라국)에 이르렀다. 염라대왕과 박생은 공자와 석가, 귀신에 대해 담론을 하게 된다. 염왕은 유교와 불교의 차이에 대해서, 주공(周公)이나 공자는 문명한 중국의 성인이므로 그 교는 정도로써 사(邪)를 물리쳤지만, 석가는 간흉한 서역의 성인이므로 몽매한 자를 깨우치기 위해 사도(邪道)로써 사를 물리쳤을 뿐이지 혹세무민(惑世誣民)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백성이 불교에서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여 사람이 죽은 지 7일 뒤에 재를 올려 천도하고 지전을 올려 대왕께 죄를 비는 풍속이 있은 즉, 이런 경우 대왕께서는 악인이라도 용서해 주냐고 박 서생이 물었다. 염왕은 그러한 것은 들은 바도 없으며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없다고 하였다. 또 제사의 귀신과 조화의 귀신이 다를 바가 없다고 하고, 귀신이 어떤 형체가 있어 함부로 인간의 화복(禍福)을 가하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부질없이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여 화를 없애려 한다고 미신을 경계하였다. 대왕은 박 서생이 강직하여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기백을 장하게 여겨 염라국의 통치자인 자기 자리를 물려주어 죄인을 심판하게 한다. 꿈에서 깨어난 박 서생은 몇 달 뒤에 세상을 떠나 염라대왕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꿈에서나마 염라대왕과 담론을 펴고, 다시 염왕에게 약속받은 대로 몇 달 뒤에 저승으로 가서 자리를 이어받는다는 설정은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단절되지 않았음을 잘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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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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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랑반혼전』21)보우가 지었다는 설이 있다(황패강, 「나암 보우(懶庵普雨)와 왕랑반혼전(王郞返魂傳)」, 『국어국문학』 42·43, 1969 참조).은 불교의 윤회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길주에 사는 왕사궤(王思机)에게 죽은 아내 송씨가 11년 만에 삼경에 방문하여 창을 두드려 자고 있던 왕랑(王郞)을 깨운다. 송씨는 왕사궤가 부처를 배척한 일로 내일 저승사자가 당신을 잡으러 올 터이니 불전(佛前)에 나아가 참회하라고 넌지시 이른다. 왕사궤를 잡으러 온 저승사자는 그가 열심히 염불하는 모습을 본대로 염라대왕에게 아뢰니 대왕은 왕랑의 죄업을 용서하고 부부의 환생까지 약속하여 송씨를 살려 내어 인간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죽은 지 오래된 송씨는 월지국 옹주의 몸에 의탁하여 환생하였으며, 부부는 다시 만나 함께 불공을 닦아 극락세계에서 재탄생한다.

재미있는 것은 염라대왕이 “송씨는 명을 마친 지 이미 오래되어 가죽과 뼈가 흩어져 없으니 혼을 어디에 붙일꼬?”라고 묻자 판관은 지혜를 발휘하여 송씨의 혼을 월지국 옹주에게 의탁하여 도로 나게 함이 마땅하다고 아뢴다. 환생을 하려면 넋이 돌아올 육신이 있어야 하는데 돌아와서 붙을 육신이 없으니 의탁하는 방식으로 환생한다. 환생이라는 전제 조건을 앞에 두고 육신의 소멸을 염두에 두면서 의탁하는 방식을 고려해 둔 결과일 것이다.

『삼사횡입황천기』는 조선시대에 선비 세 명이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 된 것을 보고서 사자들이 지부(地府)로 잡아간다.22)『낙양삼사기』, 『삼사기』, 『삼설기』 등으로 불린다(박건회, 『별삼셜긔』, 조선서관, 1913. 시대적 배경이 ‘영종대왕 중엽’으로 나온다). 지부에 이른 세 선비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최 참판(參判)은 명부를 들추어 보고 이네들이 10년 일찍 잡혀왔음을 알고서 염라대왕에게 보고한다. 죄 없이 잡혀온 지 28 일이나 되어 그사이 혼백을 붙일 시신조차 장사 지내 버렸을 것이라고 발악을 하자 염라대왕은 할 수 없이 이네들을 재상가에서 다시 태어나게 해 주겠다고 말한다. 두 선비는 적절한 요구를 하여 염라대왕이 이를 들어 주고 인간 세상으로 환도(還度)를 허락하였으나 나머지 한 선비는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여 당장 내쫓김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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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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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왕랑반혼전』의 경우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방식을 취하였다. 죄 없이 잡혀온 이는 반드시 되돌아간다는 믿음을 설정함으로써 ‘죽을 짓을 하거나’, ‘죽을 시간이 당도하지’ 않는 한 아무렇게나 저승으로 가지는 않는다는 믿음을 공유하게끔 하는 것이다. 반혼과 달리 영혼이 현현하는 경우는 아주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씻김굿이나 오구굿에서 무당이 조상을 불러내면 불려나온 영은 자손을 마주보면서 평소에 맺혔던 말을 하거나 예언을 던져 준다. 영혼의 현현은 모든 천도 의례의 핵심으로서 만약에 조상이 현현하는 극적인 장면이 없다면 굿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무당은 현현한 조상의 대리인으로 1인 2역을 담당하며 망자의 말을 전하여 유족의 한을 풀어 주게 된다.23)예를 들어 봉산탈춤의 진오귀굿 장면에서 죽은 할미는 무당의 공수를 통하여 현현한다. “왔소 왔소, 만신의 입을 빌고 몸을 빌어 내가 왔소.”라고 ‘만신의 입’을 빌렸음을 분명히 한다. 굿의 형식 논리로는 망자의 넋을 풀어 주는 것이지만, 실제 내용으로는 유족의 넋을 풀어 주는 것으로 간주된다.

① 부제학 유숙(柳潚)의 모친 이씨는 어려서 난리에 양친을 잃은 서얼 유사종(柳師從)의 딸을 데려다 키웠다. 몇 년 뒤에 혼기(婚期)가 차서 적합한 사람을 골라 시집보내니 그날 꿈에 유사종이 나타나 절을 하며 고마워하 는데 이상하게도 부인의 자색 장의를 입고 있었다. 꿈에서 깬 이씨가 아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서 부인 옷을 입고 나타난 까닭을 모르겠다고 하였다. 유사종의 딸이 곁에서 듣고 방성통곡을 하며 말하기를, 유사종이 난리를 만나 죽었는데 염습(殮襲)할 때 옷이 없어 모친이 입고 있던 옷을 입혀서 염습했다고 하였다. 딸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24)『어우야담(於于野談)』 부제학유숙대부인이씨(副提學柳潚大夫人李氏).

② 홍중성(洪仲成)이 일찍 상처했을 때 아들 하나가 있는데 말을 배우기 전이었다. 4, 5년 뒤에 그 아이가 낮잠을 자다가 어떤 부인이 자기를 껴안고 울면서 불쌍하다고 한다며 놀라 깨어 울었다. 유모가 그 부인의 모습을 물어보니 죽은 어미의 모습이었고, 옷도 평소 즐겨 입던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귀신을 만나 보았다는 사람이 모두 헛것이 아니다.25)『어우야담』 홍중성조상실(洪仲成早喪室).

③ 감사 윤안국(尹安國)은 수로로 중국에 가다가 물에 빠져 돌아오지 못하였다. 하루는 그 가인(家人)이 윤 공이 성대한 행차로 집에 돌아오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절을 하였다. 윤 공이 사당에 들어간 뒤 행방이 묘연하더니 홀연 생시(生時)의 목소리로 시렁 위에서 말을 하였는데, 미래의 허물이나 하인의 작폐(作弊)를 지적하고 아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26)『매옹한록(梅翁閑錄)』 윤감사안국(尹監司安國). 말미에 덧붙이기를, “정기가 곧 소멸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①은 꿈에 현몽한 망자, ②도 꿈에 현몽하여 자손을 돌보는 조상신, ③도 역시 조상신의 음덕을 강조하였다. 조상이 꿈에 보이는 것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로, 21세기의 현대 삶에서도 조상의 현현은 자주 나타난다. 당대발복(當代發福)을 기원하는 풍수지리상의 음택(陰宅), 묏자리를 탐하는 송사(訟事), 유교식 사당은 물론이고 굿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조상굿의 존재 등은 조상의 음덕이 대단히 중요함을 인식하게 한다. 다음에 예를 든 것처럼 조상이 나타나 생명을 구해 주기도 하고, 묘를 찾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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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초상
이제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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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백사가 어릴 때 유모가 백사를 데리고 나갔다가 깜빡 잠이 든 사이에 백사가 우물로 향하여 가서 매우 위험하였다. 이때 유모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유모를 치는 바람에 유모가 놀라 깨어나 백사를 구하였다. 유모가 나중에 보니 그 노인의 모습이 익재의 영정과 같았다. 몇 백 년 뒤의 후손을 생각함이 이와 같았다.27)『매옹한록』 백사이공항복(白沙李公恒福).

② 영남의 선비가 경서(經書)를 따르며 행실을 닦고 있었는데, 선조의 묘가 모읍(某邑)에 있다는 말을 듣고도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선비가 그 읍을 두루 다니다가 나이 여든 된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이 그 묘의 위치를 알려 주고서 농사짓던 사람이 땅을 빼앗길까 봐 지석(誌石)을 버렸다고 덧붙였다. 선비가 제사를 지낸 뒤에 지석을 찾다가 실패하였는데 밤에 손자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나타나 효성을 칭찬하고 지석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꿈에서 깨어난 선비가 그 장소를 파서 지석을 찾아보니 과연 그 선조의 묘였다.28)『천예록(天倪錄)』 초후예교이진적(招後裔敎以眞迹). 말미에 이르길, “사람이 죽어도 신이 남아서 어리석은 후손을 꾸짖고 가상한 후손을 가르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망자가 왔다간 구체적 증거는 제사상이나 굿상의 제물취식(祭物取食)에서 잘 드러난다. 제사상이나 굿상에 제물 차림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의 예에서 보이듯이 망자들이 실제로 먹고 간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① 고경명(高敬命)이 순창 군수가 되었을 때 염병을 얻어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꿈 이야기를 했다. 고경명은 사자를 따라서 관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순창 경계의 굿하는 민가에서 잘 얻어먹었다고 했다. 수소문하여 알아보니 고경명의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 사실이었다.29)『어우야담』 고경명위순창군수(高敬命爲淳昌郡守).

② 명원군(明原君)은 종실인(宗室人)으로 중년에 병을 얻어 죽었다가 3일 뒤에 소생하였다. 소생한 뒤에 말하기를, 처음에는 온몸이 아프더니 얼마 뒤 통증이 가라앉아 창틈으로 나가 넓은 들에 나가니 음악 소리가 들리며 여러 귀신들이 제향을 받고 있었다고 했다. 귀신들이 새로 죽은 귀신은 먹지 말라 하여 화가 나서 먹지 않았다고 했다. 살아난 뒤에 자제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는 영혼도 먹을 수 있으니 제사를 폐하지 말라고 하였다.30)『어우야담』 명원군종실인야(明原君宗室人也).

③ 민기문(閔起文)이 승지가 되었을 때 새벽종을 듣고 대궐에 가는데 말 위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민기문이 길에서 죽은 친구 유경심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자신의 자제가 술과 음식을 받들어 올려서 그것을 먹고 돌아가는데 술기운이 돈다고 하였다. 민기문이 괴이하게 여겨서 사람을 시켜 그 집에 가보게 하니 유씨 자제가 아버지 기일이 그날이어서 제사를 막 지내고 철거하는 중이었다.31)『어우야담』 민기문승지시(閔起文承旨時).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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