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2장 상장례의 역사와 죽음관
  • 3. 삼국시대 사람들의 사생관과 상장례
정종수

상장례는 제례와 함께 실생활에 영향을 많이 미쳤을 뿐만 아니라 일상 행동에도 제약을 많이 가져왔다. 어느 시대에나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원리와 이에 상응하는 윤리관이 있어서 그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례란 이름을 빌려 질서를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현상에 따라 나타난 것이 바로 상례 풍속이다. 따라서 상례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대에나 보이는 민속 현상으로 그 민족의 사생관(死生觀)과 조령관(祖靈觀)을 나타내는 의례이다. 동시에 상례는 장기간 지속되는 관습으로 시대, 민족, 지역, 문화에 따라 방법이 다양하며, 복잡한 문화 요소가 습합(習合)하여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생활과 사회상을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모든 의례는 당사자가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상례는 한 인생이 마지막으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로, 본인이 아닌 다른 생존자들이 진행하는 데 특징이 있다. 상례는 다른 예에 비하여 변화의 폭이 좁았고 가장 정중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후손들의 조상에 대한 숭배 또는 조상에 대한 경외 때문이다. 즉 조상의 영을 옛 법대로 모시지 않는 것을 가장 큰 불 효로 여겼고, 그러한 불효를 저지르면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에게 무서운 화를 준다는 민중의 사고가 자고이래(自古以來)의 상례 절차를 함부로 변형할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죽음은 단순한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개인의 죽음은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사회 구조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사회적인 의미가 있으며, 상례라는 의례를 통해서 변화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죽은 사람이 남긴 틈을 상징적으로 메워야 한다.

우리의 전통적 상례라 할 수 있는 유교적 상장 의례의 절차는 예를 실천하는 주체자인 생자의 심정 변화에 따라 초종례(初終禮)에서부터 소·대상(小·大祥)을 거쳐 담담한 마음으로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담제(禫祭)에 이르기까지 19절목 60여 항목으로 나누어 실천하도록 하였다. 비록 의례 절차가 복잡하고 행하기가 까다롭지만 그 절차 하나하나에는 어버이에 대한 효심과 생명의 존엄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이전의 상장 의례는 자료가 대부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장법(葬法)에 국한되어 있거나 극히 제한된 문헌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의 상장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과 『후한서(後漢書)』에서 볼 수 있다. 「위지동이전」에 나타난 장례 풍속은 정상(停喪), 순장, 후장, 상복제, 복장제 등이다.

부여에서는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얼음을 넣어 장사 지내고, 장사 때 사람을 죽여서 매장하는 순장제(殉葬制)를 실시하였다.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데, 곽은 사용하나 시신을 넣는 관은 사용하지 않았다. 또 될 수 있는 한 장례 기간을 길게 하는 것을 예로 알아 5개월장을 행하였다.

장례에 얼음을 사용하는 것은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장례 기간이 길면 시신의 부패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한여름에는 시신이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쓰게 된다. 시신이 부패하는 속도 를 늦추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얼음을 사용하는 것이다. 얼음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의 예를 보면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장례 기간이 길어서 부득이 관 밑에 얼음을 놓아 시신의 부패 속도를 늦추었다. 신분과 직급에 따라 왕과 왕비는 5일째 되는 날 시신을 입관하고 5개월장을, 4품 이상의 대부(大夫)는 3일 동안 빈(殯)하였다가 3개월장을, 선비는 3일 동안 빈하였다가 유월장(踰月葬)인 1개월장을 치렀다. 이처럼 시신을 묶어 관에 넣기까지 기간이 길고, 장례 기간 또한 길다 보니 자연 시신이 부패하게 마련이다. 부여도 장례 기간이 5개월로 조선시대 왕의 장례 기간과 같을 정도로 길어 자연히 장례에 얼음을 쓴 것이다.

동옥저(東沃沮)의 장례는 부여와는 달리 뼈만 추려 묻는 이중장(二重葬)을 행하였다. 동옥저 사람들은 장사를 지낼 때 큰 덧널(大木槨)을 만드는데 그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며 한쪽 끝, 즉 머리 쪽을 열어서 문을 삼았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여 가죽과 살이 모두 썩게 한 다음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한다. 한 가족의 유골을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보관하는데,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본떠 나무로 깎은 인형을 죽은 사람 수대로 넣어준다. 또 옹기로 만든 솥에 쌀을 담아서 널(槨)의 문 옆에 엮어 매달았다.43)『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이는 일차장이라고 생각되는 빈(殯) 과정을 거쳐 탈육(脫肉)이 다 되면 뼈만 취하여 이차장에서는 커다란 목곽 속에 일가의 뼈를 넣는 이중 장법이다. 의식 면에서 동옥저의 풍속과 차이가 있지만 이와 유사한 장법을 오키나와(沖繩) 지역에서도 찾을 수 있다.

죽은 지 몇 년 또는 몇 십 년이 지난 뒤에 관 뚜껑을 열고, 가족 중 모든 여자는 포성(泡盛)으로 손을 깨끗이 닦고 그 물을 몸에 뿌린다. 그리고 그 가운데 죽은 자와 가장 가까운 혈연이 두개골을 물로 깨끗이 씻고 다지(茶紙, 다색의 물이 잘 스며든 지나지(支那紙))로 닦은 뒤 마라카비라는 백지에 이 를 받아 적당한 곳에 놓는다. 그러고 나서 참가한 여자 모두가 유체(遺體)를 나누어 가지고 완전히 세골(洗骨)을 마치면 골호에 발 뼈부터 쌓아 두개골을 제일 위에 놓는다. 그런 다음 골호의 뚜껑 안에 사망 연월일과 세골 연월일을 성명과 함께 기록한다.44)金城朝永, 「琉球に於ける洗骨の風習」, 『葬送墓制硏究集成』 第1卷, 名著出版社, 1979, 212쪽.

재생 관념에서 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데, 뼈를 통해서 죽은 자가 재생, 부활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정신과 의사인 이부영은 뼈를 통한 재생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해체의 궁극적인 목적은 골격으로의 환원이며 그보다 더 작은 해체는 없다. 골격은 원시인에게 있어서는 최소 단위 그 이상 분화할 수 없는 요소이다. 뼈는 파손되어서는 안 되며 잃어버려도 안 된다. 만일에 없어지면 다른 사람의 뼈를 빼와야 하고 이에 그 사람은 죽는다. 뼈는 그러므로 다시 살아나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뼈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영원불변의 창조적 원천의 상징이며 영혼의 근원적인 구조이다.45)이부영, 「입무(入巫) 과정의 몇 가지 특징에 대한 분석 심리학적 고찰」, 『한국 문화 인류학』 2, 한국 문화 인류학회, 1969, 117쪽.

일차장이 육탈의 기간으로 죽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면 시체가 완전히 해체된 뒤 뼈만 가지고 치르는 이차장은 죽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새로운 재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유사』 「혁거세조」에 “승천한 후 7일 후에 유체(遺體)가 산락(散落)했다.” 하는 것은 7일이 만월의 중간, 즉 재생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시체의 분단도 재생 부활력을 획득하기 위한 신화적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뼈에서부터의 재생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시베리아 산림 지역의 정착적 수렵 민족 사이에는 동물의 유골을 보존하여 그 뼈를 통하여 재생할 수 있다고 하는 습속이 있는 점이다. 또 동물의 두골과 사지골을 보존하는 관행이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재생 관념(再生觀念)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고대인은 죽어서도 이승에서와 같이 계속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고대인에게 골(骨)은 인간의 골격을 형성하는 것이므로, 뼈 없이는 형상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중장과 같은 장속을 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들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부여와 신라의 순장 풍속은 이들의 계세(繼世) 관념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계세 사상은 새로운 재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변한과 진한에서는 장사 지낼 때 관 밖의 덧널에 큰 새의 깃털을 꽂았다. 삼한은 장사 때 소와 말을 잡아 사용하였다. 장사 때 곽에 새의 깃털을 꽂는 것은 새가 영혼을 현세에서 천상 세계로 운반하는 매개자 노릇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새는 천상으로 가는 데 인도자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예는 무덤이나 주거지에서 출토된 새 형태의 토기나 청동 거울, 동검 등에 새겨진 새의 문양에서 알 수 있다.

또 장송(葬送)에 우마(牛馬)를 쓰는 것은 부를 상징하는 재산적 가치와 종교적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고대에 소와 말은 교통수단일 뿐만 아니라 전쟁할 때 중요한 동물이었다. 또 말은 죽은 자의 영혼을 지하에서 명계(冥界), 즉 천상 세계로 운반하는 매개 동물로 생각하였다.

북방 민족의 하나인 야쿠트(Yakut) 인의 무속에 따르면 샤먼은 맹금모(孟禽母, Bird of prey mother)라는 새를 가지고 있는데, 이 새는 평생 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샤먼이 영적으로 탄생할 때와 죽을 때로, 이 새가 샤먼의 영혼을 취하여 지하 세계로 가져가서 그 영혼을 성숙하게 하기 위해 소나무에 올려놓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즉 새가 영혼을 운반하는 매개자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아시아 샤머니즘 문화권에서 개와 말은 흔히 장례 동물과 죽은 영혼의 인도자로서 기능하는데, 특히 천상·지상·지하라는 세 우주계를 왕래할 수 있는 동물로 관념화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된 생사관을 가졌다. 이러한 고구려인의 장례 습속은 『수서(隋書)』 「고구려전」에 잘 나와 있다. 그들은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았다. 생전에 수의를 만들어 놓았다. 초상이 나면 처음에는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지만, 장례에는 풍악을 울리며 춤추고 노래를 하며 망자를 저승길로 인도하였다. 또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3년 동안 모셔 두었다가 3년이 지나면 좋은 날을 택해 장사를 지냈으며, 부모와 지아비는 3년, 형제는 3개월 동안 상복을 입었다. 또 생전에 입던 의복과 패물, 수레, 말 등을 무덤 옆에 쌓아두어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가져가도록 하였다. 봉분은 돌을 쌓아서 만들고 소나무·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었다. 특히 장례에 가무를 행하는 풍속은 수백 년 동안 전해 온 유교식 상장 의례와는 배치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백제에서는 부모와 남편이 죽으면 고구려와 같이 3년복을 입었으나 나머지 친족은 장례를 마치면 바로 복을 벗었다. 이처럼 백제의 장속은 부모와 남편의 상복이 3년인 점으로 보아 고구려의 유제(遺制)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관을 사용하여 염을 하고 장사를 지냈는데, 따로 능을 설치하거나 불교의 예에 따라 화장을 하여 장골(藏骨)을 하기도 하고, 바다에 뼛가루를 뿌리기도 하였다. 지증왕 때에는 상복 제도를 제정하여 반포하였는데, 임금이나 부모·처자의 상에 모두 한가지로 1년 동안 상복을 착용토록 하여 고구려나 백제의 3년 상복 제도와는 달리 그 기간을 단축하였다.46)『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사상례」, 신라 ; 『북사(北史)』, 「동이전」, 신라.

그러나 신라의 상복 기간은 문무왕 때 “서역 나라(인도) 법식에 따라 화장할 것이며, 상복을 입는 경중은 일반 규례가 있을 터이나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와 검약하게 시행토록 하라.”는 유언을 받들어 죽은 자와의 친소에 따라 기간을 달리 하였다.47)『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1년.

신라의 화장법은 문무왕 때 시작되어 효성왕 때에 이르러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불교식 화장법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성행을 하다가 고려 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배척되기 시작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