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2장 상장례의 역사와 죽음관
  • 5. 조선시대 사람들의 사생관과 상장례
정종수

14세기 말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된 것은 단순한 성씨의 교체가 아니라 고려의 불교를 대신하여 조선에 주자학적 유학이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게 하여 사회 대부분에 변동을 가져왔다. 조선 건국에 앞장섰던 신진 사대부들은 정치·사회적으로 안고 있는 대내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실천 윤리로 『주자가례』에 바탕을 둔 유교적 상장의 시행과 가묘 설립 같은 예제를 보급해 국가 의식의 변천을 꾀하려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상장 의례와 제례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사회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중요하게 여기던 상장과 제례는 너무나 비생산적으로 세분화되고 절차 또한 매우 복잡하여, 위로는 왕실에서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실행하기가 어려워 여러 차례 개정·보완하였는데, 실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일상 행동에도 많은 제약을 가져왔다.

특히 상제례는 사회 질서 유지라는 명분 아래 교화 수단으로 작용하여 조선 초의 예제 운영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른바 무불식 상장 같은 전통적 상장과 외래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유교식 상장 제가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조선시대의 상장 의례로 자리 잡게 된다.

조선시대 상제례의 성격은 왕실과 사대부의 의례로 달리 형성되었다. 즉, 왕실은 오례를 바탕으로 한 국휼(國恤) 운영을 통하여 위엄과 왕권의 강화 수단으로 활용하였고, 사대부 계층은 『주자가례』의 사례 중 하나인 상제례의 운영을 통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시키는 명분과 통치 차원의 교화 수단인 실천 윤리로 기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사대부들이 먼저 솔선수범하고, 왕성(王城)에서 행하면 일반 백성이 자연히 따르고, 외방(外方)도 자연히 행할 것이라 하여 서인보다는 사대부가, 외방보다는 경중(京中)이 먼저 중요하게 여겨 시행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국가 차원의 강력한 제재와 사대부의 『주자가례』 시행 노력과는 달리 일반 백성은 초상이 나면 상여를 멜 향도들을 불러 모아 음식과 술을 대접하였고, 피리를 불며 노래를 불러 상주들을 위로하여 고려시대의 무불식 상장의 유풍(遺風)을 행하였다.

조선 초 세종 때의 예를 보자.

무식한 무리가 요사스러운 말에 혹하여, 질병이나 초상이 나면 즉시 야제(夜祭)를 행하며, 이것이 아니면 이 빌미를 풀어 낼 수 없다고 하여, 남녀가 떼를 지어 무당을 불러 모으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리며, 또는 승려 무리를 끌어오고 불상을 맞아들여 향화(香火)와 다식을 차려 놓고 노래와 춤과 범패가 서로 섞이어 울려서, 음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난잡하여 예절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는 일이 이보다 심함이 없으니 수령들로 하여금 엄하게 다스리게 하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와 이의 정장·색장 등을 함께 그 죄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는 초상이 나면 무당이나 승려를 불러 제물을 진설하여 가무로 죽은 자의 혼을 천도하는 의식으로, 오늘날 전라도 진도 지역에서 장사 전날 밤 에 망자의 넋을 천도하는 씻김굿이나 동해안 지방의 오구굿, 경기·서울 지방의 진오기굿·자리걷이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위호(衛護)’라 해서 조부모나 부모의 혼을 무당집으로 불러 그 사람의 얼굴 모습을 그려 모시기도 하며, 노비를 무당집에 바치고 할아버지·할머니의 신을 무당집에 가져가서 제사 지내는 자도 많았다. 이는 조상신을 무당집에 위탁하여 제사를 올리어 음덕을 받으려 하는 것인데, 사대부들이 집 안에 가묘를 두고 봉사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민간 신앙의 측면에서 본 일종의 가묘이며 무속과 유교 제의가 습합된 조상 숭배의 한 형태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무불식 상장례 풍속은 성종 때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당시에 초상을 성대하게 치렀으며, 장사 치르기 전날 밤에는 손님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주악을 베풀어 빈객을 즐겁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으며, 돈이 없어 빈객을 대접하지 못하면 장사를 연장하기까지 하여 심지어는 몇 년이 지나도록 장사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당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부모가 죽으면 장사 지내기 전날 큰 장막을 설치해 놓고 그 속에 관을 놓고 큰 쟁반에 유밀과를 잔뜩 진설하여 관 앞에서 전(奠)을 올리며, 승려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잡희(雜戲)를 하고 술을 마시며 밤새도록 노래하며 춤을 추었고, 충청도 지역에서도 경상·전라도와 마찬가지로 장사 전날 음주 잡희에 광대들이 동원되어 놀고 양반집 아녀자들도 섞여서 밤새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고 한다.

한편 죽은 지 3일과 7일째에는 무당에게 새 혼령이 내려와 지난 일과 미래를 말해 준다고 하여 으레 술과 떡을 준비하여 무당 집에 가기도 하였다.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성호 이익(李瀷)이 사람이 죽어 염을 한 뒤에 무당을 불러 길귀신을 내리게 하는데, 이는 시골 무당이 가무로 망혼을 불러 망혼의 말을 흉내 내면서 어리석은 세속인을 유혹하고 재물을 사취하며, 또 우리나라 풍속이 귀신 섬기기를 좋아한다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무속적 상 례는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방에서는 여전히 『주자가례』에 따른 유교식 상장보다는 민간 신앙적인 무불식 상장 의례가 성행하였다.

이러한 무불식 상장 행위는 사대부층에서 보면 폐풍으로 치부될 수 있으나, 일반 백성에게는 유교식 상장이 오히려 외래적 요소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장사에 향도를 불러 음식과 술을 대접한 것은 상여를 메고, 매장 조묘 등에 필요한 집단 노동력을 얻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

이러한 관행은 고구려 이래로 지속되어 온 유습일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 조직과 구성원 나름대로 공동체를 운영하는 원리로 작용하였다. 정부가 교화 차원에서 유교식 상장 의례를 시행하라고 권면(勸勉)하였는데도, 고려의 불교식 상장 유풍은 쉽게 변하지 않아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한편 상장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신료(臣僚)의 업무 공백을 메우고, 인재를 적기에 활용하기 위해 기복(起復) 제도를 통해 국가 경영의 원활을 꾀하는 한편, 예장(禮葬)과 증시(贈諡)의 법을 마련하여 신료들의 국정 참여에 대한 일정한 예우를 상장에 반영하였으며, 신료와 그 가족의 상장 때나 국가에 공을 세우거나 공무로 사망한 자에게 부의(賻儀)를 내려 공로를 인정하고 국가의 공신력을 높였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품계에 따라 장례 기간을 다르게 정하여 행하였다. 장기(葬期)는 죽은 날부터 묘지에 장사를 치를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사람이 죽어 장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상복을 마련하거나 장지를 선택하는 등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삼일장과 백일 탈상을 폐지하고, 『예기』 「왕제편」에 “천자는 7일 만에 빈하고 7개월 만에 장사 지내고, 제후는 5일 만에 빈하고 5개월 만에 장사 지내며, 대부·사·서인은 3일 만에 빈하고 3개월 만에 장사 지낸다.”라고 하여 신분에 따라 장기를 규정한 것을 참작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 4품 이상은 삼월장을, 5품 이하는 유월장을 하도록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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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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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삼일장이 가장 보편적이다. 이것은 예전처럼 장일을 길흉에 따라 정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3일이란 시간적 여유를 갖지 않으면 장사를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3일은 걸려야 최소한 예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장사에는 일정한 기준을 두어 행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세속에서는 정해진 장기가 있는데도 시신을 들에 가빈(家殯)해 놓고 오로지 음양설에 따라 자신의 이해득실만을 따져 2∼3년이 지나도록 장사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10년이 지나도록 장사를 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한 가장(假葬)이란 지금도 일부 서남해 도서 지방에서 시행하는 초분(草墳)과 같은 가매장의 한 형태일 것이다. 초분은 적어도 3년이 지나 육탈이 된 다음 길일에 뼈만 추려 이차장으로 치르는 장법이다.

오늘날과 같은 유교식 상장 의례는 조선 중·후기 『주자가례』가 널리 퍼지고 『사례편람(四禮便覽)』 같은 예서가 보급되면서, 유교식 상례가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되어 하나의 전통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조선 왕조 500년을 거쳐 현재까지도 시행되기 때문에 유교식 상장 의례가 우리 고유의 습속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 유교 문화에 따른 외래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주자가례』가 도입되어 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고유의 상장례 습속은 토속적인 민간 신앙과 불교적인 요소가 습합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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