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3장 유교식 상례
  • 1. 초종례, 임종에서 관 속에 들어가기까지
  • 초종례, 임종에서 관 속에 들어가기까지
  • 관 만들기, 치관
정종수

상을 당하면 먼저 주선을 하는 것이 관을 만드는 것이다. 호상은 목수에게 명하여 관을 만들도록 한다. 하지만 관은 미리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초상 날에 관재를 골라 관을 만들면 갑자기 적당한 관목(棺木)을 구하기가 어렵고, 옻칠도 견실하고 완전하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울 때 상을 당하면 시체를 오랫동안 둘 수도 있기 때문에 관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혹 살아생전에 미리 관을 만들어 두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관을 미리 준비하는 것은 수의를 미리 준비하는 것처럼 송사(送死)의 도로서 어버이를 위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흉사(凶事)가 나 기를 서두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버이를 위한 효라 여겼다. 70)『국조오례의』 권8, 「흉례」, 대부사서인상의 치관조.

관을 만드는 재료는 소나무·오동나무·가죽나무·버드나무·뽕나무 등이다. 가장 좋은 관재는 유삼(油衫)이고 다음이 전나무이다. 유삼은 일종의 익계목(益佳木)으로 전나무와 비슷하며 몹시 기름지고 내구성이 강하여 가장 좋게 여겼다.71)『지봉유설(芝峯類說)』 하, 훼목부, 관재조. 전나무는 측백나무로 귀신을 모이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재로 많이 쓰였다. 그래서 소나무로 만든 널의 값이 천 냥이고, 잣나무로 만든 널 값은 만 냥이라 하여 전나무 관을 상품으로 여겼다.72)『성호사설』 권5, 만물문, 회백조. 또 오동나무는 잘 썩지 않는 성질 때문에 관재로 귀하게 쓰였는데, 대개 심은 지 40∼50년이 되어야 재목감이 된다.73)『성호사설』 권4, 만물문, 동조. 뽕나무가 관재로 쓰이는 것은 습기를 방지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재로 가장 널리 쓰인 나무는 소나무였다. 우리나라는 소나무가 자라기에 알맞고 구하기가 손쉬워 궁실(宮室)·관곽(棺槨)·주선(舟船)의 재목은 모두 소나무로 충당하였다. 하지만 오동나무나 소나무 관재를 구하기 어려운 일반 서민들은 버드나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관은 천판, 지판, 사방판을 각각 판자 한 쪽씩으로 하고, 관의 높이와 길이는 시신의 길이와 부피에 맞게 한다. 관의 모양은 머리 쪽이 넓고 발쪽이 좁은 두광족협(頭廣足狹)의 형태로 상판(천판)과 좌우측판의 접합부는 못(鐵釘) 대신 나비장(袵, 나비 모양의 나뭇조각)을 끼워 결합하였고, 앞뒤 측판은 요철(凹凸) 모양으로 파서 고정시킨다.

비어 있는 관을 ‘친(櫬)’이라 하고, 시체가 들어 있는 것을 ‘구(柩)’라 한다. 관과 곽을 쓰는 것은 부모의 몸이 썩어 흙이 될 때까지 흙이 쉽사리 부모의 피부에 닿지 않게 하려는 자식의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임금의 관을 ‘비(椑)’라 하는데, 비는 음으로서 몸에 대는 관을 가리킨다. 관은 공조에서 만들고, 관 안에는 사방을 붉은 비단으로 붙이고 녹색 비단을 사각에 붙이며, 즉위한 해에 소나무의 황장판을 사용하여 만들고 매년 한 번씩 옻칠을 한다. 옻칠은 왕과 왕비의 국상에만 한정하고, 일반인들은 내관에만 허용하고 외관에 칠하는 것은 금하였다.74)『증보문헌비고』 권87, 사상례. 외관에는 송진을 써서 물이 새지 않도록 하였다.

관 바닥에는 칠성판(七星板)을 놓고 그 위에 차조를 태운 재(秫灰)를 5㎝ 정도의 두께로 깔고 시신을 안치한다. 칠성판은 1.5㎝ 정도 두께 송판에 북두칠성 모양의 구멍을 7개 뚫는다.

무엇 때문에 칠성판에 차조를 태운 재를 까는 것일까?75)『성호사설』 권6, 만물문, 도맥여신조. 재는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사물(死物)로서 정령(精靈)이 없기에 개미나 벌레같이 시체에 유해가 되는 생물의 침범을 막아 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밑에 출회를 깔면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고 습기도 없애 주고 나무뿌리의 침입을 막아 시신을 보호하는 데 좋다. 또한 입관 후 시신에서 분비되는 수액을 빨아들여 유체가 썩어도 유골이 흩어지지 않도록 한다. 칠성판은 전한 때 왕망(王莽)이 북두칠성의 위엄을 빌려 군대를 압박하고 굴복시키기 위해 5가마나 되는 구리로 두 자 반 정도의 북두(北斗) 모양을 만들어 ‘위두(威斗)’라 하고, 자신이 출입할 때마다 사람을 시켜 이를 따르게 한 데서 비롯하였다. 칠성판을 묘지에 묻는 것은 지하의 나쁜 귀신을 누르기 위한 것이다.76)『성호사설』 권13, 경사문, 칠성판조. 또 칠성판에 북두칠성 모양의 구멍을 뚫는 것은 죽음을 관장하는 북두신에게 빌어 죽음을 구제받기 위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칠성판을 쓰지 않았다. 『주자가례』에 따라 상례를 치르기 시작한 조선 초기부터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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