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3장 유교식 상례
  • 1. 초종례, 임종에서 관 속에 들어가기까지
  • 초종례, 임종에서 관 속에 들어가기까지
  • 혼백과 명정
정종수

습을 마치면 영좌(靈座)를 설치하여 혼백(魂帛)을 안치하고 명정(銘旌)을 걸어 세운다. 제상 앞에는 향상을 놓고 그 위에는 향합과 향로를, 향상 앞에는 모사 그릇을 놓는다. 혼백은 육체(魄)를 떠난 혼이 의지하라고 비단이나 명주, 베를 묶어서 만든다. 혼백은 두꺼운 종이로 만든 혼백상자에 넣어 교위 위에 모시는데, 평소에는 혼백상자 뚜껑을 덮어 놓고 혼백을 뵈올 때만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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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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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을 영좌에 놓는 것은 몸을 떠난 혼이 여기에 빙의(憑依)하라는 뜻이다. 즉 혼백은 혼의 빙의처로 고인의 영혼이 깃든 곳이다. 시신을 매장한 뒤 우제 때 이를 신주로 바꾸고 혼백은 묘에 묻는다. 신주를 만들지 않을 때는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혼백을 상청(喪廳)에 봉안한다. 신주나 혼백을 상청에 봉안해 놓고 산 사람을 대하듯 아침저녁으로 술을 따라 올리며 빗접과 세수하는 제구를 받들어 생전과 같이 효성을 다한다. 그래서 혼백 때문에 상식(喪食)이 있고 빈소가 있는 것이다.

중국 북송 때의 사마온공(司馬溫公)은 신주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옛날에는 나무로써 중(重)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 신의 신주로 삼았는데, 지금도 이런 식이 있으나 사민(士民)의 집에서는 이것을 모르는 까닭에 비단을 묶어서 신이 빙의토록 하니 이를 혼백이라 한다. 그것은 옛날부터 전해진 것이다. 세속에서는 모두 영정을 혼백 뒤에 설치하는데 남자는 생시에 화상(畵像)이 있어 그것을 사용해도 뭐라 할 바가 없으나, 부인은 생시에 규문 안에 침거하여 비록 외출할 때에도 가마를 타고 얼굴을 가리는데 죽은 뒤 어떻게 화공으로 하여금 깊은 침실에 들어가서 얼굴을 가린 면을 들추고 용모를 그리도록 하겠는가.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비례(非禮)가 된다.77)『주자가례』, 상례, 영좌 혼백 명정조.

‘중’이란 영혼이 의지하는 곳으로서 나무로 만든 간단한 인형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옛날에는 혼백을 나무로 만들어 신이 의지하도록 하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이를 모르고 인형 대신 비단으로 혼백을 만들어 썼다. 또 당시에는 혼백 뒤에 영정을 놓아 신이 빙의하도록 하였다. 오늘날 빈 소에 망자의 영정 사진을 놓은 것은 아주 오래된 습속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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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과 개명정(경북 창녕)
명정과 개명정(경북 창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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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은 2m 정도의 온폭 붉은 비단에 은박 글씨 또는 금박 글씨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쓴 기를 말한다.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 명정의 크기가 달랐으나, 쓰는 글자는 신분의 구별 없이 똑같았다. 남자는 ‘모관모공지구(某官某公之柩)’, 여자는 ‘모봉모관모씨지구(某封某貫某氏之柩)’라 쓴다. 왕이나 왕비는 묘호가 정해지면 명정을 다시 쓰는데 이를 개명정(改銘旌)이라 한다. 사대부도 이와 마찬가지로 시호를 받으면 개명정을 사용한다. 운구할 때는 긴 장대에 매어 영구(靈柩) 앞에 세워 들고 가고, 하관할 때는 관 위에 덮어 묻는다. 명정은 사자의 형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름을 써서 알아보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며, 붉은 색으로 하는 이유는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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