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3장 유교식 상례
  • 4. 유교 상례의 핵심, 삼년상
정종수

상장례는 한번 토착해 관습이 되면 나름대로 의미와 존재 이유를 가지면서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 말에 들어온 『주자가례』에 의거한 유교식 상례는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 우리나라의 전통 상례로 자리 잡아 정치·사회적으로 영향을 많이 미쳤다. 유교식 상례는 풍속을 교화시켜 질서를 세우고, 동시에 효 사상을 세우는 수단으로 삼아 국가에서도 이것을 적극 시행하라고 권장하였다.

오늘날에도 행해지고 있는 유교식 전통 상례의 핵심은 삼년상이라 할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조상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렀다. 왜 하필이면 삼년상이었을까? 1년상이나 2년상을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공자는 삼년상을 행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자식이 태어난 지 3년이 된 뒤라야 비로소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이다. 대체로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다.”83)『예기』 권58, 삼년간조. 다시 말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지극 정성이 담긴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며 누구나 지켜야 할 도리라고 하였다.

한 번은 공자의 제자 재아가 물었다. “삼년상은 너무 깁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익히지 않으면 예의가 무너지고, 3년 동안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무도 철따라 바뀌니 1년이면 그칠 만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3년도 안 되어 흰 쌀밥을 먹고 화려한 옷을 입어도 네 마음이 편하냐. 군자는 상을 당하면 맛난 음식을 먹어도 단맛을 못 느끼고, 음악을 들어도 즐거움을 못 느끼고, 집 안에 살아도 편안하지 못하다.”고 답하였다. 재아가 물러가자 공자가 다른 제자에게 “재아는 정말 어질지 못하구나. 어린애가 태어나면 3년 이후라야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재아도 부모에게서 3년 동안 아낌을 받았을 거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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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삼년상이란 자식이 태어나 혼자 먹고 활동할 수 없는 젖먹이 3년 동안 부모가 품 안에서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길러준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육신을 땅에 묻고 혼령이 깃든 신주를 모셔와 탈상 때까지 만 2년 동안 갓 태어난 아기를 품 안에서 보살피듯이 모시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또 삼년상을 행하는 것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애통한 마음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해가 한 번 돌면 천도(天道)도 한 번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역시 그것을 따라 변한다. 그러나 오직 어버이에 대한 효심은 1년이 지나도 오히려 잊지 못하는 것이고, 해가 두 번 바뀌어도 잊지를 못해 1년을 더하여 3년이면 어지간히 슬픔도 변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삼년상 제도는 언제부터 시행되었을까? 물론 공자가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다.”라고 한 것은 당시에 삼년상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습속이라기보다는, 인간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인류 공통의 예속임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시대는 물론이요, 맹자가 산 시대에도 중국에서 일반적 으로 통용된 것은 아니었다.

삼년상의 시원은 은나라 때의 시속이란 설과 주나라 때 시행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공자 이전에 이미 삼년상 같은 예속이 시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삼년상은 한대에 유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널리 시행되었으며, 마침내 후한에 이르러서는 천하지통상(天下之通喪)이 되어 당·송·명·청대를 거치면서 사회생활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삼년상이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누구나 행하는 천하의 공통적인 법인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주자가례』가 들어온 고려 말 이후에 처음 시행되었다. 사실 『주자가례』에 따라 사례(四禮)가 시작되기 전에는 무속과 불교가 습합된 무불식(巫佛式) 상장례가 주로 행해졌다.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점차 무불식 상장 요소가 배제되고 유교식 상장례로 전환되어 갔다. 고려시대에는 백일상이 일반적이었으며, 『주자가례』에 따른 삼년상제는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다. 장례도 화장을 하거나 사찰 내에 빈소를 마련하여 추천재를 올리거나, 초상이 나면 무당을 불러다 굿을 행했다. 또한 왕실에서는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해서 치르는 역월 단상제를 행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유교식 상장을 법제화하였지만 불교식으로 상을 치르는 자가 사대부 10명 가운데 6, 7명이고, 유교식으로 상장을 치르는 자는 겨우 3, 4명에 지나지 않았다. 『주자가례』에 따른 유교식 상례는 좀처럼 뿌리 내리지 못하고 15세기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착되었다.

또한 삼년상 제도가 중국에서처럼 모든 백성에게 다 적용된 것은 아니어서 신분에 따라 시행을 달리했다. 시행 초기 삼년상은 귀천이 없이 실시해야 한다는 당위론과 허락하면 군역(軍役) 체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현실론이 팽팽히 맞서 결국 사대부에게는 삼년상 시행을 강제한 반면, 서인과 군사들은 금지하였다. 왜냐하면 군인이나 서인들에게 삼년상 을 허용하면 상복만 입고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고 음식을 먹는 등 삼년상은 군역 회피의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조선 중종 때부터 점차 확대되어 삼년상은 마침내 양반이나 상민의 구별 없이 누구나 행하는 상례가 되었다.

한편 유교적 이념에 따른 삼년상 정착 과정에서 부모 삼년상의 원칙을 둘러싸고 아버지가 생존해 있고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을 경우에 행하는 부재위모기제(父在爲母期制)에 대한 복제 문제가 많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우연히 왕실에서 태조·정종·태종·세종·성종·중종 등 모두 왕비가 먼저 승하함으로써, 이 문제는 왕실에서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여 사서인의 복제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부재위모기제 원칙은 태종의 비인 원경 왕후 국상 때 처음으로 논의되어 세종 때 기년상(期年喪, 일년상) 후 심상으로 삼년상을 마치는 심상삼년제(心喪三年制)로 확립되었다.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만 입은 것은 어머니에게 박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존엄한 것이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도 존엄함을 같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대부 사이에서는 기년상을 아버지는 중하고 어머니는 경하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돌아가신 지 1년만 되면 탈상한 뒤 길복을 입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술을 마시고 상습적으로 고기를 먹는다며 기년상을 폐지하고 실질적인 삼년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삼년상제 회복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유를 내세워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기년상은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고치지 않고 계속 시행되었고, 본조에서도 이를 준행한 지 오래되었으며, 태종께서도 성인이 지은 경서를 참작하여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면 어머니의 상기는 기년으로 하는 법으로 고치었으니, 이것은 정자(程子)·주자(朱子)가 어머니의 상기를 기 년으로 한 것이 어찌 어머니를 박하게 하여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이는 태종 때에 이루어졌고 또 성인의 경서에도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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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경기 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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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심상 3년 안에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는 자나 아내를 얻는 자에 대해서 치죄(治罪)하도록 하였다.84)『세종실록』 권54, 세종 13년 11월 병인. 이 제도는 『경국대전』에 그대로 반영되어, 모상은 재최 3년이나, 아버지가 생존하였으면 11개월 만에 연제를 지내고, 13개월 만에 대상을 지내고, 15개월 만에 담제를 지내며, 관직에서 물러나서 3년 동안 심상을 행하는 것으로 하였다.85)『경국대전』 예전, 오복 제도.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상을 치렀다.

삼년상을 기초로 한 상례는 번문욕례(繁文縟禮)라는 비난을 들을 만큼 세부적인 면까지 복잡하게 규정하였으므로 까다로워 시행하기가 어려웠다. 상례가 비인간적이라고 할 만큼 엄격한 금욕 생활을 강요한 것은 상례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다른 예는 다음 기회가 있지만, 상례는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삼년상은 거의 시행되지 않는다. 사십구재나 100일 탈상을 하고, 일년상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는 부모의 시신을 매장한 다음날 3일 탈상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 아예 탈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도 허다하다.

최근에도 많이 행하는 사십구재는 불교 의식에서 온 것이다. 유교식 전통 상례에는 사십구재라는 것이 없었다. 사십구재는 고려시대 무불식 상 장제가 시행되면서 많이 행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중종 이전까지는 국상이 나면 7일마다 재를 올리는 칠칠재(7일×7일=49일)를 행하였다. 이 기간에 혼령이 방황하다가 49일째 되는 날 승천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가 급변하고 있고, 비좁은 아파트에서 방 한 칸을 내어 상청(빈소)을 마련하여 매일 조석으로 찬을 올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부모를 생각하여 삼가고 근신하는 마음가짐은 아무리 세월이 바뀌어도 변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효의 근본이고, 또 부모는 자기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소위 심상삼년 제도를 만들어, 비록 상복을 벗더라도 상중인 것처럼 행동을 삼가고 마음속으로나마 상기를 치르는 것처럼 행동하였던 것이다.

비록 과거처럼 상청을 차리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고 곡을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는 갖출 수 있다. 바로 선조들이 마음속으로나마 상기를 치르던 심상삼년 같은 제도가 그것이다. 의례는 시속에 맞게 변할 수 있지만 본질은 변할 수 없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삼년상의 본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삼년상에 들어 있는 의미를 안다면 결코 부모에게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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