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3장 유교식 상례
  • 5. 또 다른 죽음과 무덤, 조선의 왕과 왕릉
  • 왕의 죽음과 그 이름
정종수

국상(國喪)이 나면 해당 각 조에 계령을 보내고 임시 관청인 도감을 설치하여 국상과 산릉(山陵)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예조에서는 그날로 왕을 뵙는 조회를 폐하고 시장을 5일 동안 철시하고 국장을 마칠 때까지 크고 작은 제사를 정지시키며 한양과 지방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의 혼인과 도살을 금하였다. 그리고 상사에 관한 모든 일을 의정부에 보고하고 중앙과 지방에 공문을 보내 직무를 지시하였다.

병조에서는 궁궐 수비대를 통솔하여 궁 밖과 궁 안의 경비를 강화하고, 이조에서는 상사에 필요한 임시 관청인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였다. 빈전도감은 염습을 비롯한 혼전(魂殿)에 소용되는 물품을 준비하는 일을 맡는다. 관직으로는 예조 판서와 여섯 명의 당상관이 동원된다. 국장도감은 시신을 넣는 관을 준비하며 장삿날을 정하는데 호조 판서와 예조 판서가 책임을 맡는다. 산릉도감은 무덤 조성에 관한 일을 맡는다. 즉, 관을 묻는 광중을 의미하는 현궁을 비롯한 정자각, 재실 등의 영조(營造)를 맡아본다. 관직으로는 공조 판서와 선공감 을 임명하고 당하관을 여러 명 둔다. 이 세 개의 임시 도감 총책임자를 총호사(總護使)라 하는데, 보통 영의정이나 좌의정이 맡는다.

일반 사대부들이 부모상을 당하면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관직에서 물러나 거상(居喪)을 하듯이 국왕도 약 27일 정도 정사를 보지 않았는데 이를 청정(聽政)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만 해도 왕은 장사를 지내고 나서 한 달 뒤 졸곡을 마친 뒤에야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그 기간이 무려 6개월 정도 걸렸다. 하지만 국왕은 사서인(士庶人)의 예와 같지 않고 상중이라도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폐할 수 없다는 논리에 따라 그 기간이 단축되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까지는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삼년상을 치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왕권의 누수와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는 역월제를 써서 단상제를 행했다. 역월제를 쓰면 삼년상이라도 27일 만에 대상을 치르고 상례를 마칠 수 있다. 역월제를 써서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면 실제로 1년 만에 치러야 할 소상을 12일 만에 치르고 24일 만에 행해야 할 대상을 24일 만에 마쳐 형식상 삼년상을 행할 수 있다.

국상은 왕의 유언인 고명(顧命)으로부터 시작된다. 임종 직전 왕은 왕세자와 대신들을 불러놓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다는 유언과 뒷일을 부탁한다. 고명은 왕권의 전위(傳位)와 관계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임금이 유명을 내리면 이를 받아 즉위식 때 전위 교서를 반포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 임금의 환후가 점차 위급하게 되면 내시가 부축하여 머리를 동쪽으로 두게 한다. 동쪽은 생명의 근원인 해가 뜨는 곳으로, 뜨고 지고를 수없이 반복하기 때문에 생생력(生生力)이 있다고 믿어 꺼져 가는 목숨을 다시 소생시키려는 의미이다. 숨이 멈추면 햇솜을 입과 코 위에 놓아 그 솜이 움직이는지의 여부를 살펴 죽음을 확인한다.

숨이 끊어지면 혼이 나간 것으로 생각하여 안팎에서 모두 곡을 하고 바로 내시가 초혼 의식, 즉 복을 부른다. 복은 왕이 평상시 입던 윗옷을 가지 고 지붕에 올라가 북쪽을 향해 ‘상위 복(上位㚆)’ 하고 세 번 부르고 던진다. 내시가 이를 밑에서 받아 왕의 몸 위에 덮고 혼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한다. ‘상위 복’은 “임금님의 혼이여 돌아오소서.”라는 뜻이다. 복은 몸에서 빠져 나간 혼이 다시 돌아와 소생하기를 바라는 뜻이며, 북쪽을 향해 부르는 것은 죽은 사람을 관장하는 신이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죽으면 북망산천에 간다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초혼 의식을 마치면 왕세자와 대군 이하는 모두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소복으로 갈아입고,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다.86)『세종실록』 권134, 오례, 흉례 의식, 고명·복·역복불식·고사묘. 또한 왕은 소선(素膳)이라 하여 육류나 어물을 쓰지 않은 간소하게 차린 식사를 하고 금주(禁酒)하였다. 고기와 같은 육류는 보통 49일이 지난 뒤에 먹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부모가 돌아가신 슬픔을 음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초혼을 부르고 나면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습을 행한다. 머리와 상체는 기장뜨물과 쌀뜨물로, 하체는 향나무 다린 물을 사용한다. 목욕이 끝나면 새 옷 9벌로 갈아입히고 입에 물에 불린 쌀과 진주를 넣는 반함을 한다. 입 속에 쌀과 옥을 넣는 것은 차마 사자의 입속을 비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반함은 사자의 부활을 의미한다. 습을 마치면 왕의 시신을 평상에 모시고 영좌를 설치하여 혼백(魂帛)과 명정을 안치하였다. 혼백은 육체를 떠난 혼이 다시 돌아와 의지할 수 있도록 흰색 비단을 묶어 만든 것으로, 시신을 장사지내면 신주로 대신하고 혼백은 묘소에 묻는다. 명정은 망자의 이름을 쓴 깃발로 붉은 비단에 ‘대행왕재궁(大行王梓宮)’이라 쓴다. 명정을 거는 것은 죽은 자의 형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여름에는 평상 아래에 얼음을 놓아 시신의 부패를 막았다.

사흘째는 왕의 시신을 옷으로 감싸는 소렴을 하는데, 옷은 모두 19벌이다.87)소렴에 쓰는 옷은 천자나 제후, 선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19벌을 쓰도록 하였다. 왜 19벌의 옷을 입히는 것일까? 우주 만물의 생성의 천지, 즉 하늘과 땅의 수는 1부터 10까지로, 천수(天數)는 9에서 끝나고, 지수(地數)는 10에서 끝나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끝수인 9와 10을 합쳐 19벌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소렴 옷은 상하 존비의 구분 없이 천자, 왕, 사서인 모두 똑같이 19벌을 쓰도록 하였다. 한편 종묘에 왕의 죽음을 고하는 의식을 행한다.

닷새째는 시신을 묶어 관 속에 넣는다. 입관 전에 다시 한 번 왕의 시신에 옷을 입히고 이불(天衾)과 요(地衾)로 싼 다음 관에 넣는데, 이를 대렴(大斂)이라 한다. 대렴 옷은 90벌을 사용하였다.88)사대부는 대렴 때 30벌을 입혔다. 그리고 나라에 큰 의식이 있을 때 입는 면복(冕服)을 입혔다. 면복은 왕의 즉위식, 국가의 큰 제사 등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입던 의례복으로 곤룡포에 면류관을 갖추어 쓴다. 면복은 12면류 12장복으로 면류관의 유(旒, 관의 앞뒤에 늘어뜨리는 채옥(彩玉)의 줄)가 12개이고 곤복에 수놓은 장문(章文)이 12가지이다. 그래서 곤룡포에 수놓은 12가지의 문양을 12장문이라 한다.

입관을 사후 5일째 하는 것은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삼일 이전의 입관은 살인 행위와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소렴 때 얼굴을 싸지 않고 묶지도 않는 것은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또한 최종적으로 시신을 묶을 때도 매듭지어 매지 않고 끼워 넣는 것은 혹 다시 깨어나면 스스로 풀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다. 한편, 5일 만에 입관하는 것은 장례를 준비하는 기간을 확보하는 의미도 있다.

임금의 관은 재궁(梓宮)이라 한다. 재궁은 공조에서 소나무로 만드는데, 안을 벽돌처럼 단단하게 옻칠을 하고 사방에 붉은 비단을 붙이고 사각 모서리 부분에는 녹색 비단을 붙여 정성껏 만든다. 왕이 즉위하면 그 해에 관을 만들어 해마다 옻칠을 하였다. 효종이 죽었을 때에는 미리 만들어둔 관이 너무 적어 임금의 시신이 들어가지 않아 갑작스럽게 넓은 관재를 구할 수 없어 널빤지 두 개를 이어 만든 관을 쓰기도 하였다. 물이 스며들 수 있기 때문에 관재는 두 판을 이어 쓰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

재궁은 입관 하루 전에 바닥에 차조를 태운 부드러운 재를 약 5㎝ 정도 깔고, 그 위에 칠성판을 올려놓은 후 두꺼운 종이로 칠성판의 구멍을 발라 막고, 다시 그 위에 붉은색 비단 요와 돗자리를 깔고 왕의 시신을 모셨 다. 그리고 시신이 움직이지 않도록 평소에 입었던 옷으로 관 속을 꽉 채우고 생전에 빠진 치아와 모발, 손톱과 발톱을 주머니에 넣어 관의 네 모퉁이에 놓았다.89)시신이 움직이지 않도록 관 속의 빈 공간에 넣는 옷을 보공의(補空衣)라 하며, 염습 때 깎은 손톱과 발톱을 넣는 주머니를 조발낭(爪髮囊)이라 한다. 그런 다음 관 뚜껑을 덮고 옷칠을 하고서 나무로 만든 나비 모양의 살대(袵 장: 나비장)를 관 양쪽에 세 개씩을 끼워 고정시킨다. 관 뚜껑과 관 사이는 청초를 발라 메우고 관의(棺衣)로 덮은 다음 빈전에 옮겨 장삿날까지 모셨다.90)『세종실록』 권111, 세종 28년 3월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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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왕의 빈전
정조 대왕의 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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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과 왕비는 5개월 만에 국장을 치렀다. 이 기간 동안 시신을 모시는 곳을 빈전(殯殿) 혹은 찬궁(欑宮)이라 하였다. 빈이란 집 안에 시신을 가매장한 장소를 말한다. 국장을 치를 때까지 왕은 빈전 옆에 지은 여막에 거처하면서 수시로 찾아와 곡을 하여 부모를 잃은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 한 예로 문종이 즉위한 지 6년 만에 부왕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문종은 여막에 거처하면서 3일 동안 물과 미음도 대지 않았으며, 등창이 나 곪아 터졌는데도 여막을 뜨지 않아, 보다 못한 대신들이 따뜻한 내전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치료할 것을 청했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고 빈전을 지켰다.

빈전은 장사 때까지 5개월 정도 왕의 시신을 안전하게 보존해야 하기 때문에 위치 선정에서부터 설치, 관리에 이르기까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다음은 태종의 국상 때 『세종실록』에 기록된 빈전의 설치와 재궁의 안치 방법이다.

빈소는 벽돌과 불로 구워 만든 돌과 박석으로 가실(假室)의 바닥을 정전 중간에 쌓고, 석회를 가지고 빈틈을 바른다. 자리를 깔고 그 위에 평상을 놓고 대자리와 요를 깐 후 장막과 요와 병풍을 정전 중간 북쪽 공처에 설치하여 임시로 혼백(魂帛)과 책보(冊寶)를 둘 자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평상 위에 관을 안치한다. 이때 머리는 남쪽으로 향하도록 하고, 관의를 덮고 다시 기름종이(油單)로 싼 다음 하얀 무명으로 묶는다. 그런 다음 볶은 기장·피(稷)·벼(稻)·양(粱)을 담은 광주리를 각각 두 개씩 만들어 수족이 있는 데에 하나씩 놓고 나머지 네 광주리는 양쪽에 좌우로 나누어 놓는다. 머리를 남쪽으로 두는 것은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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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왕의 찬궁
정조 대왕의 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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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실은 관을 안치하는 평상의 길이와 폭에 따라 먼저 사면에 방틀 나무를 설치하고, 그 위에 기둥 네 개를 세우고 대들보와 서까래를 걸고, 벽면을 대로 엮어 만들고 두꺼운 종이를 발라 주작·현무·청룡·백호를 사면에 그려 붙인다. 그리고 둥근 쇠고리를 방틀 네 귀에 박고 밧줄로 고리를 꿰어 결박하고, 북쪽의 벽과 방틀을 떼어 내고 가실을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밀어 관을 덮고, 다시 북벽을 막고 진흙으로 밖과 위를 바른 후 마포로 덮고서 두꺼운 종이로 바르고 장막을 치고 천장을 덮는다. 영좌는 찬궁 앞에 남향으로 설치하고, 명정을 영좌 오른편에 세운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과 상식을 올릴 때 임금은 궤연 곁에 모시고 있다가, 제사를 마친 뒤 여차(廬次)로 돌아오는 것을 규례로 하고, 빈전은 발인한 뒤에 폐지한다.91)『세종실록』 권16, 세종 4년 5월 경오.

재궁의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뜻이며, 광중에 안치할 때에 머리를 북쪽으로 두는 것은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92)『필원잡기』 권1, 『대동야승』 권3. 이처럼 재궁을 방 안에 두지 않고 찬궁을 따로 설치한 것은 장사 때까지 시신의 부패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임금의 재궁을 빈전에 안치하고 나면 세자를 비롯한 상주들은 상복으로 갈아입고 성복례를 행한다. 성복례란 모든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각기 정한 상복을 입은 뒤에 서로가 복인(服人)이 된 것에 대해 인사하는 예이다. 평상복을 벗고 상복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은 죽음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 다. 5일이 지나도 왕이 살아나지 않으면 세자의 즉위식을 치른다.

즉위식은 사후 6일째 행한다. 세자는 잠시 상복을 벗고 면복(冕服)으로 갈아입은 후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즉위 교서를 반포한다. 이처럼 상중에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사위(嗣位)라 하고, 즉위 교서 반포를 반교서(頒敎書)라 한다. 왕의 즉위 교서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선왕에 대한 애모의 뜻을 담는다. 둘째, 임금의 자리는 오래 비워 둘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빨리 즉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종친과 대소 신료들의 간청에 마지못해 즉위하였음을 나타낸다. 끝으로 범법자를 풀어 주는 사면령을 담고 있다. 사면은 모반과 같은 대역죄와 부모·남편·주인을 주살한 패륜 행위를 제외한 모든 범죄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새로 즉위한 국왕은 중국의 황제에게 부고를 내 국상이 난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청시사(請諡使)를 보내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시호는 죽어서 남기는 이름으로 죽은 이의 일생이 함축되어 있다. 천자는 왕의 행장을 보고 그에 합당한 시호를 정하여 보내 주었다. 시호는 두 글자로 조선 태조의 강헌(康憲), 세종의 장헌(壯憲) 등은 모두 중국 황제가 내려준 시호이다.

국상을 알리러 중국에 갈 때에는 고부사(告訃使), 청시사(請諡使), 진향사(進香使), 진위사(陳慰使)를 비롯해 호송군 수백 명이 함께 간다. 중국 황제는 시호와 함께 부의품을 보내온다. 황제의 조문사는 보통 빠르면 3개월, 늦을 때는 5개월이 넘게 걸려 장례를 치른 뒤에 도착하기도 한다. 태조 이성계의 국상 때는 비단 500필, 양 100마리, 술 100병을 부의품으로 보내왔다.93)『태종실록』 권16, 태종 8년 9월 임진. 청시사와 함께 간 수백 명이 넘는 호송군들은 말이 호송군이지 사실상 무역상이나 다름없었다.

중국에서 보내온 시호와는 별도로 나라에서 자체로 시호를 정해 올렸다. 하지만 왕비의 시호는 중국에 받지 않고 자체에서 의논해 정하였다. 왕이 죽으면 당연히 중국 황제에게 알리도록 되어 있지만 왕비의 경우는 그런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사정을 봐 알리기도 하고 아예 부고를 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태조의 강비 국상 때는 명나라에 알렸지만 정종의 비가 승하했을 때에는 부고를 보내지 않았다. 태종의 비 원경 왕후의 국상 때는 중국에 부고를 보내긴 했지만, 혹여나 황제에게 사제(賜祭)나 부의를 바라는 인상을 줄지 몰라 부고에 어보(御寶)를 찍지 않고 언제 죽었다는 사실만 기재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을 꼼꼼히 따져 행했던 세종은 왕비 소헌 왕후가 죽자 이를 명나라 황제에게 알려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몰라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원경 왕후의 국상 때처럼 어보를 찍지 않은 부고장만 보냈다. 국상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세종은 왕비의 경우는 알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책에서 보고 급히 사람을 보내 고부사로 간 사신을 불러들였다. 그러면서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던 황희, 맹사성, 김종서 등 여러 대신들을 불러 놓고 “제발 책 좀 읽어라, 이게 무슨 나라 망신이냐.”고 질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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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옥책(太祖玉冊)
태조 옥책(太祖玉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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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시호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왕의 행적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기록하여 행장(行狀)을 만든다. 시호는 봉상시(奉常寺)에서 관장하였는데, 장사 지내기 전에 시호에 사용되는 글자를 모아 예조에 올려 검토한 다음 다시 의정부에 보고하였다. 의정부에서는 육조·집현전·춘추관 등 2품 이상의 관료들이 모여 시호를 의논하여 정해지면 이를 왕에게 보고하여 결정하였다. 시호의 글자 수는 왕의 경우 4자·6자·8자로 모두 짝수로 하였는데, 8자가 가장 많았다. 특별한 공적이 있다는 왕에게는 4자를 더하여 12자가 된 경우도 있는데 세조는 시호가 무려 20자였다.

시호는 공조에서 제조하였는데 시책(諡冊)과 시보(諡寶) 두 가지를 만든다. 시책은 시호를 여러 편의 옥에 새겨 탁본하여 이를 책으로 엮은 것으로, 시호와 시호에 담긴 왕이나 왕비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시보는 시호를 도장에 새긴 것으로, 글자는 전자(篆字)로 쓴다. 제조는 주석으로 만든 후 금으로 도금하였고, 높이는 4.5㎝ 정도이다. 시책과 시보가 완성되면 종묘에 고하고 빈전에 모셔두었다.

시호를 정할 때 묘호(廟號)와 능호(陵號)를 함께 올려 정했다. 묘호는 종묘에서 부르는 호칭으로 두 글자로 되었는데, 예컨대 태조, 태종, 세종, 영조 등을 말한다. 능호는 왕릉의 이름이다. 시호가 인간으로서 왕과 왕비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라면, 묘호는 왕의 업적, 즉 왕으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에 대한 평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묘호는 왕만이 가질 수 있으며, 왕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왕의 업적을 평가하는 항목은 공(功)과 덕(德) 두 가지였다. 왕의 공을 나타내는 글자는 조(祖), 덕을 나타내는 글자는 종(宗)이었다. 조 자는 나라를 새로 세운 왕이나 황제에게는 앞에 클 태(太)를 붙여 태조라 하였다. 이러한 묘호법에 대해서는 호칭의 이모저모를 후술할 때 좀 더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이와 같은 시호, 묘호, 능호는 대개 왕이 죽은 지 1개월이 지난 뒤에 정하도록 하였다. 달을 넘겨 정하는 것은 어버이가 아직 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94)『예종실록』 권1, 예종 즉위년 9월 경진.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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