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3장 유교식 상례
  • 5. 또 다른 죽음과 무덤, 조선의 왕과 왕릉
  •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저승길, 국장
정종수

국상은 왕권의 계승 및 왕실의 권위와 직접 관련되기 때문에 어느 의식보다도 장엄하고 중요하게 다루었다. 국상 의례는 임금이 뒷일을 부탁하는 고명을 시작으로 시신을 능에 안장을 하고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까지 절차가 모두 67항목으로 되어 있다. 이는 사서인의 상례를 기록한 『주가가례』의 52개 절차보다 15항목이 더 많다. 이러한 국상은 단순히 예의 범위를 넘어 통치 능력의 과시, 윤리의 강조, 긴장 등을 조성하여 왕권에 대한 항거를 불가능하도록 하였다. 한편으로는 산릉 조성에 따른 필요한 도구 개발과 토목 기술의 축적으로 국력의 정비 내지는 일종의 국가 운영을 검증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실로 국상은 거대한 국가적 행사이다. 한정된 기간에 많은 인력과 물자의 동원을 수반하는 국상은 사회·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후세에 참고하도록 하기 위하여 『국상의궤(國喪儀軌)』라 하여 국상의 전말, 소요 경비, 참가 인원, 의식 절차, 행사 후의 논공행상(論功行賞) 등을 기록하였다. 『국상의궤』는 항목별로 분류하여 기록하고 또한 행사의 모습, 각종 기물·반차도(班次圖) 등을 그림으로 나타내거나 이를 채색도로 표현하여 행사의 경위, 절차, 형식, 인원, 물자 조달, 건축물의 설계 등을 조목조목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국장은 언제 누가 결정하는가? 국장은 국장도감에서 관할하는데 국상이 난 지 5개월이 되는 달에서 고른다. 장일(葬日)은 관상감(觀象監)에서 장사하기 좋은 날(吉日) 3일을 골라 왕에게 보고하면 왕은 그 중에서 하루를 정하였다. 하지만 “사주가 좋으면 팔자가 좋고, 장삿날이 좋으면 자손에 좋다.”는 속신 때문에 길일을 골라 장사를 치르기 위해 장삿날을 당기거나 늦추는 일이 많았다. 한 예로 예종은 부왕 세조가 죽었을 때 5개월장을 치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장을 치러야 할 달에 길일이 없어 무려 두 달을 앞당겨 3개월장으로 치르기도 하였다.

국장은 사실상 발인 3일 전에 사직과 종묘에 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왕은 국장 하루 전에 대군, 왕자, 종친, 문무백관이 참여한 가운데 빈전을 여는 의식을 갖는다. 이를 계빈의(啓殯儀)라 하였다. 국장 책임자인 우의정 이 찬궁 남쪽 앞에 나아가 “우의정 신 아무개는 삼가 좋은 날(吉辰)에 빈전을 열게 되었습니다.”라고 아뢴 뒤 선공감(繕工監) 관원이 빈전을 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상여에 재궁을 옮겨 장지로 출발할 때까지 대곡(代哭)을 시켜 곡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였다.

빈전에서 재궁을 대여(大輿)에 옮겨 싣고 떠나기 직전에 조전의(祖奠儀)를 행했다. 이는 사대부 상례에서 발인 전날 사당에 고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빈전 앞에서 임금과 대군 이하 왕자·종친·문무백관의 자리를 설치하고, 제물을 영좌 앞에 진설한 다음 왕이 주상이 되어 의식을 거행하였다. 조전의 조(祖)는 중국 황제의 아들 누조를 의미한다. 누조는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여 길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에 누조를 도로의 신으로 모시게 되었고,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은 누조에게 제사를 올려 무사하기를 기원하였다.95)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 문화』, 돌베개, 2002, 206∼207쪽.

조전의를 마치면 상여를 떠나보내는 의식인 견전의(遣奠儀)를 발인 직전 문 앞에서 지냈다. 이때 국장도감에서 발인에 필요한 요여와 대여, 길장(吉仗)·흉장(凶仗)·명기 등의 상장구를 문 밖에 준비하였다. 견전의는 망자가 집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올리는 하직 인사로, 발인제와 같다.

또한 임금의 관을 실은 대여가 무사히 장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발인 전날 사직단에 가서 날씨가 쾌청하기를 빌고, 당일에는 궁문과 성문에서 오십 신들께 제사를 지냈으며, 대여가 지나가는 교량·명산대천에도 제사를 지내 장지까지 무사히 운구하기를 기원하였다.

상여는 대개 밤 11시에서 3시 사이에 왕궁을 출발하였다. 장지가 거의 하루 이상의 거리에 떨어져 있어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밤에 장지에 도착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96)『단종실록』 권2, 단종 즉위년 8월 무자 ; 9월 정축. 문종은 단종 즉위년 8월 28일 자정에 견전례를 행하고, 재궁을 받들어 여에 태워 광화문 밖에 이르러 대여에 봉안한 다음 동대문 밖에서 노제를 지내고, 능소(陵所)에는 오후 3시(午時)에 도착하였다. 3일 후인 9월 1일 축시(새벽 1시∼3시)에 재궁을 현궁에 하관하였다. 대여가 성문 밖에 이르면 노제를 지냈다. 국장 당일 장지까지 가지 못하는 백관과 승도, 생도, 기로(耆老), 수많은 관료들이 성문 밖에서 노제를 통하여 향을 올리고 마지막 하직 인사를 하였다.

조선시대 국장 행렬에는 왕과 문무백관, 각도 관찰사, 유복지친(有服之 親), 군인, 상여군(喪輿軍), 곡비 등 약 1만 명이 따라갔다.97)왕비와 공주 등 여친(女親)들은 산릉에 따라가지 않는다. 태종의 국상 때 헌인릉으로 가는 국장 행렬에 참가한 사람의 수는 무려 9,500명이었다. 인조의 비 한씨가 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창경궁에서 승하해 파주 운천리에 장사 지냈을 때도 상여군을 포함해서 6,770여 명이 뒤따랐다. 특히 국장 행렬에는 곡비(哭婢)가 산릉까지 따라가며 곡을 하였다. 태조 국상 때는 통곡비라 하여 저잣거리의 잡색 여자들로 하여금 산릉까지 곡을 하며 따라가게 하였으나, 보기가 좋지 않다고 하여 궁인과 관비로 대신하였다.

행렬의 맨 앞은 800여 명의 군사들이 세 부대로 나누어 섰고 그 뒤를 무기와 붉은색 장대를 든 12부대의 군인들이 따랐다. 왕과 군대를 상징하는 각종 깃발을 든 수백 명의 기수들과 여러 필의 어마(御馬), 70명이 나누어 멘 작은 가마 두 대를 비롯해 공작과 용이 그려진 일산(日傘)과 임금의 유언장이 든 요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국장 행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시책과 시보(담군 15명), 혼백 요여(담군 120명), 만장(48장), 명기(담군 15명), 애책(담군 30명) 등을 실은 가마가 서고, 이어 명정과 왕의 관을 실은 큰 상여가 바로 그 뒤를 이었다. 눈이 넷 달린 가면을 쓴 방상시 넷이서 왕의 혼백을 실은 가마 좌우에서 창과 방패를 휘두르며 잡귀와 부정을 막으며 따라갔다. 큰 상여는 200명이 메는데, 모두 800명이 동원되어 4교대로 메고 갔다. 처음에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바퀴가 달린 유차(柳車)를 썼으나, 좁고 험한 도로 사정으로 쓰기 불편하여 세종 때부터 어깨에 메는 상여를 쓰기 시작하였다.98)정종수, 「조선 초기 상장 의례 연구」, 중앙 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1994, 122∼127쪽.

국상의 경우 산릉까지 거리가 멀어 대개 발인은 한밤중에 하였다. 때문에 큰 상여 앞에서 횃불을 든 거화군 500명과 촛불을 든 500명이 길을 밝혔다. 횃불을 든 사람들은 행렬 바깥쪽에, 촛불을 든 사람들은 행렬 중간에 자리 잡고 불을 밝혔다. 횃불은 행렬 후미에도 500명을 배치해 안전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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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왕의 국장 행렬
정조 대왕의 국장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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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큰 상여 뒤쪽에서 60명이 메는 수레(御輦)를 타고 따라갔다. 왕이 탄 수레 앞에는 국장도감, 빈전도감의 관원과 나팔대, 내금위·충순위 소속의 군인들이 왕을 호위하였으며, 그 뒤를 대군, 왕자, 종친, 백관이 말을 타고 따라갔다. 그리고 행렬 맨 뒤에는 선두와 마찬가지로 기수와 군사, 국장도감과 빈전도감 관원들이 뒤따랐다.

산릉에 호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정해진 순서와 차례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특히 큰 상여와 작은 가마를 멘 사람들과 기수, 횃불을 든 거화군들에게 ‘하무’라고 불리는 막대기를 입에 물려 능지(陵地)로 가는 동안 잡담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국장 행렬은 규모와 참여하는 인원이 방대하기 때문에 사전에 충분한 도상 연습이 없으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정해진 순서와 차례대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국장 행렬의 위치와 차례를 그림으로 나타낸 발인반차도(發靷班次圖)를 만들었다.

다음은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나오는 세종 대왕의 비 소헌 왕후의 국장 때 이야기이다.

1446년(세종 28) 7월 16일 새벽 2시, 캄캄한 밤에 왕비의 재궁을 실은 대여가 경복궁을 출발, 산릉으로 향하였다. 동대문에서 노제를 마친 행렬이 살곶이 다리(현재 한양 대학교 옆)에 이르렀으나 장마로 물이 불어 다리를 건널 수 없게 되자 배로 부교를 만들어 재궁을 옮겨 삼전도 들에서 멈추었다. 때마침 폭풍우가 몰아쳐 한강을 건널 수가 없어 부득이 대여를 다시 돌려 낙천정(한양 대학교 근처)에 모셔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관의 머리를 어느 쪽으로 두어야 될지 몰라 우왕좌왕하였다. 한쪽에서는 관의 머리를 남쪽으로 두어야 한다고 하고, 혹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는 등 신하들끼리 옥신각신하였다. 이때 정인지가 “빈소에서는 어버이가 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여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이며, 매장할 때 광중에 머리를 북쪽으로 두는 것은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아직 안장(安葬) 전이니 지금은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고 말 해 소동은 일단락되었다.99)『필원잡기』 권1, 『대동야승』 권3.

낙천정에서 하룻밤을 보낸 국장 행렬은 “왕비의 재궁이 배를 타고 건너면 좋지 않다.”는 속설 때문에 강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왕비의 관을 실은 큰 상여가 아침 아홉 시가 되어도 출발을 못하자 세종은 사람을 보내어 이제 비도 개었고 중국의 역서에도 관을 배에 태워 물을 건너는 것이 좋지 않다는 금기 내용이 없으니 빨리 강을 건너갈 것을 재촉하였다. 한나절이 지난 뒤에야 겨우 재궁을 실은 배가 한강을 건너 시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릉 앞에서 잠깐 멈춰 인사를 하고 능소인 영릉에는 오후 늦게야 도착하였다. 소헌 왕후는 7월 16일 경복궁을 출발하여 나흘째인 7월 19일에야 영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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