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3장 유교식 상례
  • 5. 또 다른 죽음과 무덤, 조선의 왕과 왕릉
  • 문화의 보고 왕릉, 그 비밀
정종수

조선 왕조의 왕릉은 태조의 조상이 묻힌 이북의 ‘북도 팔릉’과 여주의 세종 영릉(英陵)과 효종 영릉(寧陵), 그리고 영월의 단종 장릉을 제외하면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40㎞ 안에 있다. 왕릉은 그야말로 문화의 보고요, 명당의 상징이다. 한마디로 왕릉은 풍수의 비밀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왕릉은 곧 왕실의 권위를 상징한다. 때문에 왕릉의 축조 기간은 대략 3∼4개월이 걸리고, 규모도 엄청나 대규모의 인력이 동원된다. 그래서 국상 의례에서도 왕릉의 조영은 국왕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조선조 500년 27대 동안 조성된 왕릉은 왕과 왕비를 포함해 무려 44기에 이른다. 평균 14개월마다 한 기씩 조성된 꼴이 되어 국가적인 재정 소모는 물론 대규모의 인력 동원에 따른 민폐도 적지 않았다.

왕릉의 조영은 예조의 당상관과 풍수학 제조가 관상감의 지관과 조선 최고의 풍수들을 동원해 명당을 찾는 일로 시작된다. 한양 주변 100리 안팎 의 여러 곳을 물색해 천거된 후보지는 조정에서의 논의를 거쳐 왕이 결정하였다. 능지가 결정되면, 먼저 장삿날을 정하여 영역(塋域)의 네 모퉁이를 파서 각각 한 푯말을 세우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 묘터를 파기 시작하였다.

능지 선정은 대개 왕이 죽은 뒤에 하지만, 생전에 하기도 하는데 이를 수릉(壽陵)이라 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수릉지(壽陵地)를 정하려고 손수 과천과 서울 안암동에 거둥해 물색하기도 하였다. 또한 계비 신덕 왕후 강씨의 시신을 관 속에 넣자마자 백의로 갈아입고 안암동으로 나아가 친히 능터를 선정해 팠다가 물이 솟아나 포기하고, 왕비가 죽은 지 열흘째 되는 날 사랑했던 강비의 무덤을 좀 더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법도에 어긋난다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의 망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지금의 정동(영국 대사관 자리)에 묘를 썼다. 도성 안에 능을 쓴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왕릉은 뒤에 높은 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산 능선의 언덕 끝자락에 있는데, 대개 남향으로 축조되었다. 능 좌측은 동쪽이 되어 청룡이 되고 우측은 서쪽이 되어 백호(白虎)가 된다. 그리고 능 앞 남쪽은 주산보다 낮은 안산이 있어 주작이 되며, 묘역 안에 내가 있어 물이 동쪽으로 흘러 모아지는 곳을 명당, 즉 좋은 터로 여겼다.

이런 터에 조성된 조선시대의 왕릉은 형태에 따라 단릉(單陵), 쌍릉(雙陵), 삼연릉(三連陵), 합장릉(合葬陵), 동원이강릉(同原異剛陵),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 등으로 나눈다. 단릉은 왕이나 왕비 중 어느 한 분만을 매장해 봉분이 하나인 능을 말하고, 쌍릉은 한 담장 안에 왕과 왕비의 무덤 두 기가 나란히 있는 형태이다. 삼연릉은 왕과 왕비, 계비의 봉분 세 기가 나란히 조성된 능을 의미한다. 합장릉은 왕과 왕비의 관을 함께 매장하여 한 개의 봉분으로 조성한 능을 이른다. 능선(陵線)을 달리해 조성한 동원이강릉은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배후 좌우 두 언덕에 각기 한 기씩 조성한 능이고, 동원상하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가 아닌 한 능선에 상하로 배치한 양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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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과 현덕 왕후의 능
문종과 현덕 왕후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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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의 인력이 들어가는 왕릉 공사는 산릉도감에서 관장한다. 산릉도감에서는 현궁과 정자각, 비각, 재실, 봉분 등의 조성과 각종 석물, 부대 시설에 대한 일을 맡는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살아생전 거주하던 궁궐과 같았다. 왕릉으로 진입하는 첫 입구에는 능을 관리하는 관리들의 처소(齋室)를 두어 종9품 벼슬의 능참봉(陵參奉)과 능지기들이 근무하였다. 왕릉 주위에는 경계 표시인 해자(垓字)를 파놓아 화재를 막는 한편 물이 잘 빠지도록 하였다. 이 물이 합쳐서 흐르는 능실의 앞 도랑에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금천교(錦川橋)라 하였다. 마치 궁성 안을 흐르는 명당수에 설치한 다리를 금천교라 했던 것과 같다. 금천교를 지나 능실로 들어서는 들머리에는 붉은색의 신문(神門)인 홍살문을 세워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었다. 홍살문 좌측에는 배위(拜位)가 있다. 왕이나 신하들이 제사를 지내러 왔을 때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고 들어갔다.

참배를 마친 왕은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丁字閣)에 이른다.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수십 미터의 돌길을 참도(參道)라 하였으며, 정자각에서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신교(神橋)로 연결하였다. 참도는 중앙을 경계선으로 하여 능 쪽에서 보아 한 단 높은 오른쪽은 혼령이 다니는 신도(神道)이고, 한 단 낮은 왼쪽을 어도(御道)라 하여, 임금 즉 사람이 다니는 길로 삼았다. 이는 왼쪽은 양이고, 오른쪽은 음이기 때문에 음인 신령이 다니는 오른쪽을 한 단 높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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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과 비각
정자각과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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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이 시신을 모신 곳이라면 정자각은 신령과 인간이 만나는 공간이다. 즉 정자각은 제향을 하는 곳이다. 안에는 혼이 깃들 수 있도록 의자를 놓았는데, 궁궐 정전의 용상과 같다. 때문에 보통 무덤에서는 봉분 앞에 설치한 상석에다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지만, 왕릉은 상석이 아닌 정자각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래서 왕릉에서는 이를 상석이라 하지 않고 혼이 놀고 머무는 곳이라 하여 혼유석(魂遊石)이라 한다. 또한 일반 무덤에서는 먼저 산신에게 산신제를 지낸 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만, 왕릉은 그 반대이다. 왕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존재이기 때문에 왕릉에서 먼저 제사를 지낸 다음 능 밑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정자각은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하여 동쪽으로 올라가 서쪽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참도를 지나 정자각에 올라가는 동쪽에는 계단이 둘이지만, 내려오는 서쪽은 하나밖에 없다. 정자각에 오를 때는 신령과 사람이 신도와 어도를 따라 오르기 때문에 계단 둘이 있어야 되지만, 제사를 마치고 내려올 때는 신령이 능으로 바로 가버리기 때문에 사람만 내려오도록 계단 하나만 둔 것이다.

정자각이란 이름은 건물 모양이 ‘정(丁)’ 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혹은 제각(祭閣)을 정 자 모양으로 지은 것은, 중국에서 보았을 때 조선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간 기운 정 자 방향이기 때문이라 한다. 반면 황제의 능침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일(日)’ 자 모양으로 지어 침전(寢殿)이라 불렀다. 황제가 왕보다 신분이 한 단계 높기 때문이다.

정자각 왼쪽에는 비각이 있다. 비석에는 왕릉에 묻힌 왕이나 왕비의 시호와 일생 행적을 기록하였다. 이처럼 왕릉과 민묘(民墓)는 비석을 세우는 위치도 다르다. 왕릉은 정자각 왼쪽에 비를 세우지만, 민묘는 봉분과 상석 사이에 세우거나 무덤 오른쪽에 세운다. 특히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은 신도비(神道碑)를 무덤 입구의 동쪽 길 옆에 세우는데, 혼령이 동쪽에서 오기 때문에 이를 안내하기 위한 것이다. 태조의 건원릉이나 태종의 헌릉처럼 초창기에는 왕릉에도 신도비를 세웠지만, 문종 때 “예부터 왕의 행적은 따로 실록에 기록되는데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워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신하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이후로는 세우지 않았다.

비각 바깥쪽에는 능제를 지낼 때 제사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수복방(守僕房)과 제사  지내기에 앞서 몸을 재계하는 재방(齋房)이 있다. 그리고 정자각 뒤편 오른쪽에는 제사 지낸 후에 축문을 태워 묻는 작고 네모난 돌이 있는데, 예감(瘞坎)이라 부르는 곳이다.

왕이나 왕비의 재궁을 모신 봉분에서 무인석까지는 거의 평평한 지형이지만 정자각까지는 심한 경사가 졌는데, 이를 사초지(莎草地) 또는 강(岡)이라 한다. 이를 정자각 뒤편에서 보면 작은 동산처럼 보인다. 둔덕으로 된 강은 왕릉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사초지를 오르면 옆으로 길게 일직선으로 놓인 장대석(長臺石)이 나온다. 이 돌은 이승과 지하 세계를 나누는 경계석이다. 이를 경계로 왕과 왕비가 영원히 잠들어 있는 봉분이 조성되었고, 그 주위를 문관석, 무인석, 석호, 석마 등이 마치 살아 있는 군왕을 모시듯 호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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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건원릉 근경
태조의 건원릉 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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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능의 앞쪽을 제외한 동·서·북 삼면에 담을 둘러 바람을 막았는데, 곡장(曲墻)이라 하였다. 그리고 봉분 밑에는 열두 조각의 판석으로 둘러 주위와 경계를 짓고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다. 마치 병풍처럼 둘렀다 하여 병풍석 혹은 둘레돌(護石)이라 부르는데, 우리나라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기법이다. 그리고 병풍석 외곽을 다시 난간처럼 두른 난간석(欄干石)을 설치하여 곡장과 함께 이중으로 울타리를 쳤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둘레돌을 쓰지 마라.”고 유언하여 광릉은 둘레돌을 설치하지 않았다.

난간석 바깥쪽에는 돌로 만든 호랑이(石虎) 네 마리와 양(石羊) 네 마리를 각각 밖을 향하도록 세워 능침을 호위하였다. 호랑이는 능을 지키는 수호신이고, 양은 사악함을 물리치는 파수꾼이다.

봉분 앞에는 사각형으로 된 돌이 있는데, 이를 혼유석(魂遊石)이라 한 다. 혼유석이란 혼이 이곳에서 논다 하여 붙인 명칭으로, 일반 무덤에서는 이를 상석이라 하여 제물 받침대로 쓴다. 봉분 앞 양옆으로는 망주석(望住石) 한 쌍을 세웠다. 망주석은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묘표(墓表)이다. 망주석을 보고 신령이 찾아온다고 한다. 흔히 무덤에 문인석, 장명등 같은 석물은 세우지 않더라도 망주석만은 빼놓지 않고 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혼유석 아래에는 장명등(長明燈)을 세워 무덤을 밝혀 신들이 놀 수 있도록 불을 밝히고 잡귀와 부정을 막았다.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불이기 때문에 무덤 앞에 설치한 것이다. 장명등은 조선 초기에는 지붕을 팔각으로 하였다가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사각 지붕으로 양식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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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공민왕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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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등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석마(石馬)를 대동한 채 서 있고, 그 아래에는 장검을 빼어 든 무인석(武人石) 한 쌍과 석마 한 쌍이 당당하게 서 있다. 이러한 문무석(文武石)은 무덤을 지키고 지하의 군왕을 섬기는 시종 역할을 한다. 중국 한나라 때에는 문무석 대신 장승을 세우기도 했 다. 그 영향인지 고려시대 무덤의 문인석은 조각 수법이 장승처럼 조악하다가 점점 시대가 내려오면서 세련되었다.

이와 같이 능묘 주위에 석물을 세우는 상설 제도는 중국의 전한시대에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무상과 십이지신상이 배치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성덕왕릉에서였다. 이러한 능침 제도는 14세기 말 고려 공민왕과 노국 공주의 능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왕릉 제도는 이를 기본으로 하여 발전되었다.

왕릉의 조성 양식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왕과 왕비의 재궁이 묻힌 현궁(玄宮)이다. 현궁은 돌로 축조하였다. 하지만 현궁을 돌로 축조하는 것은 『주자가례』의 회격(灰隔) 제도와 어긋나기 때문에 왕릉의 현실(玄室)을 고려 때처럼 돌로 축조할 것인지 회격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였다. 태종은 신료들의 의견이 석실과 회격으로 나뉘어 통일되지 않자 고심 끝에 세자를 종묘에 보내 동전을 던지는 점을 쳐서 태조의 능을 석실로 결정하였다.

능실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각형 모양의 지하 공간인 광(壙)을 팠다. 묘광의 크기는 대략 가로 9.4m, 세로 8m, 깊이 3.1m였다. 흔히 풍수에서는 무덤을 팔 때 “상투 끝이 보일락말락할 정도만 파라.”는 속설 때문에 깊이 묻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일반 무덤들은 깊이가 대개 1.2m 정도로 아무리 깊어도 1.8m를 넘지 않는다. 왕릉의 깊이는 보통 무덤의 배가 넘는다. 왜 그렇게 할까? 왕릉의 깊이를 10자(3.1m) 정도 파는 것은, 임금 ‘왕(王)’ 자가 ‘십(十)’ 자의 아래위를 막은 모양으로 왕기(王氣)는 십 자 속에서 난다는 속설 때문이다. 그래서 왕릉 공사에 참여하였던 지관들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비밀로 하는 것이 불문율로 전해져 왔다.

이러한 속설 외에도 왕릉에 시신을 깊이 파묻는 심장법(深葬法)을 쓰는 이유는 빗물이나 습기의 침투를 막고, 한기를 차단하여 한겨울에도 시신이 어는 것을 방지하며, 벌레·뱀·개구리·나무뿌리 등의 침범을 막아 시신 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도굴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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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건릉 현실에 그려진 사신도
정조의 건릉 현실에 그려진 사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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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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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비를 한 봉분 속에 합장하면 동분이실(同墳異室)이라 하여 지하 광을 둘로 구분하고 중간에 칸막이를 세워 좌우 두 개의 석실을 만들었다. 이처럼 석실을 동분이실로 할 경우 능에서 앞(남쪽)을 바라보았을 때 왕의 시신은 서쪽, 왕비의 시신은 동쪽 석실에 안치하였다.100)세종의 “산릉 제도는 마땅히 무덤은 같이 하고, 현실은 다르게 해야 한다.”는 명에 따라 영릉을 동분이실로 축조하였다. 즉, 능 하나에 봉분 속 석실은 둘로 하여 합장할 수 있도록 하되, 오른쪽 석실은 세종 자신의 수릉으로 하고, 왼쪽의 현실에 왕비인 소헌 왕후 심씨를 안장하였다. 조선조에서 이러한 합장 형식은 영릉이 처음이다. 죽은 자의 자리는 서쪽을 높이 여겼다.

좌우의 석실은 대략 두께가 1m, 길이가 4m이고, 중간 칸막이 돌의 높이는 2m로 하여 동실과 서실로 구분하였다. 칸막이 돌에 직경 50㎝ 정도 크기의 구멍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서로 왕래하도록 하였다. 요즈음도 부부를 합장할 경우 관과 관 사이에 구멍을 뚫어 놓는다.

그리고 석실과 흙벽 사이에 숯가루를 15㎝ 정도 채워 회층(炭層)을 만들어 습기가 스며드는 것을 막고, 다시 130㎝ 정도의 회격을 하여 견고하게 하였다. 회격은 삼물(三物) 즉 석회, 모래, 황토를 3:1:1로 섞어 물에 갠 것으로 굳으면 돌보다 더 단단하다.

석실이 완성되면 천장에는 유연묵(油烟墨)으로 하늘의 일월성신과 은 하를 그렸는데, 해는 붉은색으로 동쪽에, 달·별·은하는 서쪽에 흰색을 사용하여 그렸다. 그리고 네 벽에는 먼저 분을 바른 다음 사신도를 그렸다. 벽의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북쪽에는 현무, 그리고 여닫을 수 있는 돌문으로 된 남쪽에는 주작을 그렸다. 동서 양쪽의 청룡과 백호의 머리는 모두 남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 현무의 머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그린다. 그리고 남쪽 돌문 위에 그리는 주작은 양쪽 문을 닫으면 한 형체를 이루도록 그리되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왕릉은 사신(四神)의 호위를 받는 지형에 터를 잡은 뒤 능 안에 다시 사신도를 그려 배치함으로써 풍수지리적으로 완벽을 기하였다.101)『세종실록』 권134, 오례, 흉례 의식 치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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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
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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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
주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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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석실에 재궁을 넣는 곽(槨)을 돌로 할 것인지 나무로 할 것인지에 대해 신료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1446년(세종 28) 세종의 비 소헌 왕후가 승하하였을 때 일이다. 왕비의 능지가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었지만, 세종은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선영 곁에 장사하는 것보다 못하다며 동분이실(同墳異室)로 능을 축조하도록 하였다. 이는 하나의 봉분 속에 합장할 수 있도록 석실을 둘로 나누는 것으로 오른쪽 현실은 후 일 세종 자신을 안장하게 하고, 왼쪽의 현실은 소헌 왕후 심씨를 안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현실에 관을 안치할 때 석곽(石槨)으로 해서 관을 묻자는 주장과 그냥 목곽을 설치해 묻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이는 유해가 땅의 기운(地氣)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걸린 일이었다. 석곽으로 쓸 경우에는 지기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우의정 하연(河演)은 왕비의 능에는 모름지기 석곽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집을 지을 때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면 기둥이 썩지 않고 흙바닥에 세우면 쉽게 썩는 것과 같은 이치로 석곽을 쓰는 것은 흙이 살갗에 닿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과학적 식견을 가지고 있던 이천(李蕆)은 흙이 살갗에 닿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시체를 관곽에 안치하라는 것이지 굳이 석곽을 가리켜 말한 것은 아니라며 석곽 사용을 반대하였다. 정승 정인지(鄭麟趾)도 만일 석곽을 썼다가 목관이 썩어 없어지면, 백골이 돌 위에 놓이게 되어 오히려 해가 될까 두렵다며 석곽을 써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신료들 사이에 의견이 통일되지 않자, 세종은 직접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세종은 석곽에 물이 들면 시신이 물에 뜨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 차라리 시신을 짚으로 싸서 묻느니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 물이 들어도 바로 빠져 시신이 안온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굳이 무너지는 것이 염려되어 석곽을 쓰고 싶다면 물이 스며들더라도 고이지 않고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석곽 가운데를 파내고 덮개돌을 덮고 밑바닥은 돌을 쓰지 않고 맨 땅으로 하면 될 것이라 하였다.

임금의 이 같은 의견에 산릉도감 제조(提調) 이천은 만일 목곽으로 했다가 나무가 썩어 무너질 수 있고, 석곽을 쓰면 몰골이 돌바닥에 드러날 수 있으니 석곽을 견고하게 만들어 물기가 침범치 못하도록 하고 밑바닥은 바닥 돌을 없애 지기를 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하였다. 세종은 이천의 주장을 받아들여 바닥이 없는 석곽을 만들도록 하였다.

왕릉의 석실 제도는 세조 때 회격으로 바뀌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마라.”는 세조의 유언으로 광릉은 석실 대신 회격으로 하였고, 이후 왕릉은 모두 회격으로 조성되었다. 현궁을 석실로 축조하면 지하 광중 작업에만 인부가 6,000명이 들어간다. 그러나 석실을 회격으로 바꾸어 축조하면 작업 인원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이처럼 석실에서 회격묘로 바뀐 것은 엄청난 비용과 시간의 절감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왕릉 조영에는 얼마나 많은 인력이 들어갔을까? 왕릉 조영에는 막대한 규모의 인력이 차출되었다. 공사 기간은 대개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인부들은 경기·충청·황해·강원도 등 전국에서 징발되었으며, 부역자들도 군인·관청의 노예·농민·보충군·별군·공조 소속의 장인·상인·승려 등 광범위한 계층이 동원되었다. 또 소 한 마리는 열 사람 몫을 쳐주어 공사에 참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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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본 세종의 영릉
뒤에서 본 세종의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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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왕릉 공사에 동원된 규모이다. 태조 의 건원릉은 1408년(태종 8) 6월 12일 태조가 승하한 지 16일 만인 6월 28일 능지를 선정하고, 4개월의 공사 끝에 그해 9월 9일 건원릉에 안장되었다. 산릉 역사에 동원된 역군은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모두 6,000명이었다. 세종은 어머니 원경 왕후의 헌릉을 조성할 때는 모두 1만 4,000명을 징발하였는데, 경기·충청도에서 각각 3,000명, 강원·황해도에서 각각 2,000명, 수군이 4,000명이었다. 여기에 들어간 장인은 모두 224명이었다.102)『세종실록』 권10, 세종 2년 10월 병신.

1446년(세종 28)에 조성한 소헌 왕후의 영릉은 선대의 건원릉이나 헌릉보다도 공사에 투입된 인원이 훨씬 많았고, 공사 기간도 더 길었다. 영릉의 역사는 경기·강원·충청도 지역의 군사 등 모두 1만 5,000명을 징발하여 4월부터 7월까지 공사를 실시하였다. 공사 중 죽은 사람이 무려 100여 명이나 되었으며 부상자와 병든 사람은 이보다 더 많았다.103)『세종실록』 권113, 세종 28년 7월 신미.

왕릉의 조성 공사는 산릉 자체 공사 이외도 능에 사용될 돌의 채석과 운반, 운구 행렬을 위한 부교 가설, 도로 건설 등에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

또한 왕릉의 퇴락, 풍수설로 인하여 능을 이전할 경우에도 국장 못지않은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1469년(예종 원년) 2월 30일에 세종의 영릉을 여주로 옮기기 위해 능을 파기 시작했다. 파헤쳐진 석실 내부에는 걱정했던 물기가 전혀 없었고 왕과 왕비의 관과 각종 부장품도 새것처럼 깨끗하였다. 매장한 지 19년이 지났는데도 세종과 왕비의 시신은 말할 것도 없고 수의 하나 썩지 않고 그대로였다.

왕릉을 옮기는 작업은 부역군 5,000명과 석공을 비롯한 장인 150명이 20일 동안 작업을 해야 하는 대역사였다. 여기에 소요될 식량만도 쌀이 2,646가마 5말이고, 소금이 82가마 3말이었다. 하지만 능 이전 작업은 당초 계획보다 15일이 더 늘어나 35일 동안 계속되어 실제 들어간 비용과 인원은 훨씬 많았다. 능 이장 작업이 시작된 지 35일 만인 1469년 3월 6일에 세종과 소헌 왕후의 관은 여주로 옮겨져 영릉에 안장되었다. 이때 동원된 상 여군은 1,500명이나 되었고, 이들이 서울에서 여주까지 3교대로 상여를 메고 갔으니 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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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석이 생략된 영릉의 봉분
병풍석이 생략된 영릉의 봉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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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은 건원릉이나 헌릉처럼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한 형태인데, 한 봉분 앞에 혼유석이 두 개 놓여 있어 합장릉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내부 현실도 석실이 아닌 회격으로 하였다. 세조가 능 조영에 너무 많은 인력이 소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석실과 병풍석을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왕릉 조성이나 천장(遷葬)에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자에게는 국가에서 장사를 치러 주고, 부상자들은 치료와 보상을 해 국가의 공신력을 높였다.

왕릉의 조영을 마치면 항구적인 관리를 위해 수릉군(守陵軍)을 배치하였다. 왕릉의 수호를 위한 수릉 제도는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역사가 오래되었다. 수릉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일본 등지에서도 행한 공통적인 제도로 한나라 때 시작되었다. 한나라 때에는 효성이 지극한 조신(朝臣)을 수릉관으로, 환관을 시릉관(侍陵官)으로 삼아 머리를 풀어 헤치고 한결같이 효자가 부모를 섬기듯이 시행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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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홍릉의 침전과 석물 배치
고종 홍릉의 침전과 석물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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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수묘인(守墓人)을 둔 것은 고구려로,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수묘인을 둔 기록이 보인다. 그 후 고려시대에도 능의 관리와 이를 수호하는 관원과 간수인(看守人)을 두었는데, 수릉호(守陵戶)라 불렀다. 수릉 제도는 조선에 들어와 강화·정비되었는데, 제반 사무는 예조에서 담당하였고, 관원으로는 참봉을 두어 능을 관리토록 하였다. 능참봉 밑에 관직과 무관한 양인(良人)을 뽑아 수릉군으로 삼았다. 수릉군은 국장을 마치고 왕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기 전까지는 왕과 왕비의 경우 각각 70명씩 모두 140명을 두다가, 위패가 종묘에 옮겨지면 줄여 모두 10명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능을 중심으로 일정한 구역 내에 살면서 그 역에 종사하였다.

수릉군은 산릉의 보수라든가 보토, 잡목·잡초 제거, 능 주변의 방목·경작 금지 등의 임무를 맡아 능의 훼손을 방지하였고, 왕의 능행이나 제사 에 필요한 노동력 등을 제공하였다.

조선의 왕릉 제도는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로 격상시킴에 따라 황제 신분에 맞게 바뀌었다. 가장 큰 차이는 왕릉과 달리 정(丁) 자 모양의 정자각이 일(一) 자로 지어졌으며 이름을 침전(寢殿)이라 하였다. 또한 문무석과 석상들이 봉분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왕릉과는 달리, 황릉(皇陵)은 석물들이 홍살문과 침전 사이에 도열해 있다. 그것도 석양·석호·석마에서 왕릉에서는 볼 수 없었던 코끼리·해태·사자·낙(駱) 등의 거대한 석물들을 새로 등장시켜 황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었다.

홍살문에서 침전에 이르는 돌길(參道) 또한 왕릉과는 달리 3등분하여 가운데를 높여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였다. 이는 중국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만든 것이다.

문인석과 무인석도 일반적인 왕릉들과는 다르다. 문인석은 머리 모양이 복두가 아닌 금관을 쓰고 있으며, 키도 385㎝로 왕릉의 석인보다 훨씬 크다. 또 문무석은 금관조복을 갖춰 입었고 모두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그러나 황릉은 왕릉과는 달리 석물들을 침전 앞에 배치하여 웅장함이 왕릉보다 단출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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