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4장 한국의 묘제와 변천
  • 2. 삼국시대의 묘제와 부장품
  • 고구려의 묘제와 부장품
신광섭

고구려는 지리상의 특성 때문에 중국, 북방 민족과 끊임없이 항쟁하고 교류하면서 두 지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으로 낙랑 문화도 흡수하고 중국을 통하여 불교, 서역 문화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고유 문화를 바탕으로 외래 문화를 다양하게 수용하여 고구려 특유의 역동적이며 실용적인 문화를 창출하였고, 이를 백제와 신라에 전파하여 삼국 문화 형성에 기여하였다.

고구려의 무덤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돌을 쌓아 봉하고 소나무를 줄지어 심었다(積石爲封, 列種松柏).”라고 간략하게나마 나타난다. 그리고 『남사(南史)』 「동이전」에는 “곽(槨)이 있고 관(棺)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수서(隋書)』 「고구려전」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집 안의 빈소(殯所)에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뒤 길일을 택해서 묻었다고 한다. 시체를 운반할 때에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고, 장례가 끝나면 죽은 사람이 생전에 쓰던 마차와 모든 소지품을 무덤 옆에 쌓아 놓아 모인 사람들이 서로 가져가게 하였는데, 이것을 통해 고구려 사람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다.119)이호관, 「고구려의 고분」, 『한국사론』 19, 국사 편찬 위원회, 1989 ; 전호태, 「고구려 고분 벽화의 이해를 위하여」, 『역사 비평』 26, 1994 ; 강현숙, 『고구려 고분 연구』, 서울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0 ; 강현숙, 「고구려 고분」, 『고구려 고고학의 제 문제』, 제27회 한국 고고학 전국 대회, 2003.

고구려의 무덤은 겉모습에 따라 돌무지무덤과 돌방무덤으로 나뉘는데, 이들은 압록강 중류 지역과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다. 초기 무덤 양식인 돌무지무덤은 냇돌이 많은 강가나 땅을 파기 힘든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덤 양식으로, 주로 넓은 들을 낀 강변의 낮은 대지에 위치하며, 돌방무덤이 나타나면서 점차 언덕 위로 올라갔다. 이 무덤은 처음 에는 바닥에 냇돌이나 깬돌을 깔고 널을 놓은 뒤 다시 돌을 덮는 형식이었으나, 점차 돌을 네모지게 쌓거나 계단 모양으로 쌓아 올려 피라미드 형태로 발전하는데, 주로 무리를 지어 분포한다. 돌무지무덤의 기원으로는 랴오둥 반도의 청동기시대 돌무지무덤이나 주위를 돌로 쌓은 고인돌, 돌상자무덤 등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지안 지역에서는 돌무지무덤에서 한국식 동검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돌무지무덤은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네모지고 계단 모양으로 발전하면서, 돌방무덤의 영향을 받아 중심부에 널길이 달린 돌방을 만들게 된다. 이 중에서 잘 다듬은 깬돌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고 다시 큰 받침돌로 고인 거대한 돌무지무덤은 왕족이나 귀족이 만든 것이다.

고구려 초기 돌무지무덤의 좋은 예로는 중국 지안에 위치한 하활룡(下活龍) Ⅰ식 M8호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땅 표면에 방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냇돌을 깔고 중심부에 목관을 놓았는데, 기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 단계에서는 네모 기단이 있는 돌무지무덤이 나타나는데, 지안 칠성산 M879호가 그러하다. 이 유형 무덤의 내부 구조는 기단 없는 돌무지무덤과 같은데, 다만 돌무지 바깥 부분에 큰 돌로 네모 기단 한 층을 쌓은 것이 다른 점이다. 이러한 돌무지무덤의 구조는 더욱 발전하여 계단식 네모 기단 돌무지무덤이 축조되는데, 그러한 예로 환인 M15호, 양민 M74호 등이 있다. 이 무덤들의 내부 구조는 앞 시기와 같지만, 외부의 네모 기단 위에 또 네모 기단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취하여 보통 3층 정도가 되었다. 즉 기단이 점점 안으로 좁아지면서 계단 모양을 이루고 있으므로 계단식 네모 기단 돌무지무덤이라 할 수 있다. 네모 기단을 쌓는 방식은 먼저 큰 돌을 이용해 높이 약 1m 정도로 제일 아래층 기단을 쌓고 그 틈에 냇돌 등을 채워 넣어 평면을 만든다. 이 평면 위의 네 변에서 1m 정도 안쪽으로 좁혀서 제2층 기단을 쌓으며, 같은 방법으로 다시 3층 기단을 만든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3세기 말∼4세기 초에 돌 방무덤의 영향을 받아 돌무지 안에 돌방(石室)을 마련하기 시작하는데, 무기단과 계단식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무기단식인 환인 M1호 무덤은 돌방이 하나이고 평천장인 데 반해 같은 유형의 무덤인 지안 유림하 M31호 무덤은 돌방이 두 개이고 천장은 말각고임, 즉 모줄임천장이다. 계단식도 내부 구조는 무기단식과 같으며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양식 중 가장 발전된 형태의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4세기 이후에는 석실(石室)돌무지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해도 앞 단계부터 계속 사용하던 석곽(石槨)돌무지무덤도 계속 쓰였을 것으로 본다. 즉 4세기 이후부터 돌방무덤에 밀려 더는 묘제로 쓰이지 않는 6세기 이전까지는 다양한 양식의 돌무지무덤이 계속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양식적으로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을 구분하지만 무덤들 중에서 몇몇 예외적인 형식도 보인다. 무늬 없는 벽돌 또는 나무로 무덤방을 만들기도 하였고, 무덤방의 수도 한 개에서 세 개까지 다양하게 있다. 그리고 하활룡 Ⅰ식 M2호 무덤 안에서는 불에 탄 사람 뼈 조각과 목탄 부스러기가 발견되었고, 환인 M115호 북쪽 무덤과 만보정 M242-1호 무덤은 불에 탄 흔적이 있어 번소(燔燒)와 연관 있는 장례 풍습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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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장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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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장군총이나 태왕릉(太王陵)이 바로 돌방이 있는 계단식 네모 기단 돌무지무덤이다. 태왕릉은 중국 지안에 있는데 길이가 약 60m에 높이는 14m에 달한다. 무덤의 각 변에 5∼6개씩 큰 돌을 기대어 세워 놓고 냇돌과 깬돌을 섞어서 7층의 단을 쌓았는데, 각 계단의 가장자리에는 기와를 얹어 놓았다. 돌방은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돌방이 지면에 있지 않고 무덤 정상부에 만들어져 있다. 무너진 돌무지 사이에서 연꽃무늬막새를 비롯한 많은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愿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고 씌어 있는 벽돌이 발견되었다. 이는 태왕릉이 산처럼 안전하고 견고하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벽돌에 왕릉의 영구 보존을 바라는 고구려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왕릉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에서 500m 거리에 있으며, 벽돌에 태왕(太王)이라는 글이 있어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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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영총 무덤방
쌍영총 무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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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방무덤은 돌로 널길을 갖춘 굴식돌방(橫穴式石室)을 반지하 또는 지면 가까이에 축조하여 시신을 안치하고 그 위에 흙과 돌무지, 진흙, 숯, 재 등을 깐 뒤 흙으로 봉토를 만든 무덤이다. 돌방의 수에 따라 널방(主室)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墓)과 앞방(前室), 뒷방(後室), 옆방(側室) 등 두 방 이상으로 이루어진 여러방무덤(多室墓)으로 나뉜다. 천장 양식도 납작천장(平天井), 활천장(穹窿式天井), 모줄임천장(抹角藻井)으로 나뉘는데, 특히 모줄임천장은 천장 네 귀퉁이에 삼각형으로 받침대돌을 놓아 그 공간을 점차 좁혀 올리고 맨 위에 판돌 한 장을 덮는 형식이다. 이러한 돌방무덤 가운데 돌방 벽면과 천장에 당시의 생활 풍속과 장식 무늬, 사신도 등을 그린 벽화 무덤이 있는데, 벽화는 고구려의 문화를 종합적으 로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무덤의 축조 시기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구려 무덤의 껴묻거리는 재질과 종류가 다양하지만 출토 상황을 알 수 있는 예가 매우 적어 부장(副葬) 양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앞서 언급한 『수서』 「고구려전」의 내용은 박장(薄葬) 가능성을 보여 주지만 실제로는 껴묻거리를 넣는 부곽(副槨)이 있기 때문에 박장이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게다가 무기, 마구, 장신구 등 많은 종류의 부장품이 확인되고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다만 고구려의 부장 풍습은 같은 종류, 같은 형태의 껴묻거리를 중복하여 넣지 않기 때문에 많은 수의 유물이 출토되는 신라나 가야 고분과 비교한다면 박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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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 1호 무덤 무덤방
장천 1호 무덤 무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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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매장 풍속 중 주목되는 것은 번소와 제단(祭壇)으로 보는 부석 시설이다. 번소는 주검을 안치한 후 화장을 하는 것으로, 돌무지 사이에서 불탄 흔적이 관찰되었다. 지안과 환인 일대의 돌무지무덤에서는 이러한 번소의 흔적이 상당수 확인된다. 그러나 돌방무덤에서는 그러한 예가 없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무덤 양식이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변화함에 따라 번소도 소멸된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돌무지무덤의 한 변에 잇대어 직사각형의 부석 시설을 마련한 것도 주목된다. 초산 운평리 4지구 6호 무덤은 전방후원형 돌무지무덤의 대표적인 예로, 직사각형의 부석 시설을 제단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부석 시설은 점차 폭이 좁아지면서 약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만약 부석 시설이 제단으로 기능하였다면, 이와 같은 현상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부석 시설에서 행하는 장례 행사가 약화·소멸 또는 다른 방식으로 변하였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무덤은 거대한 고분이라도 외형적인 웅장함과는 달리 실물로 남아 있는 유물은 매우 빈약한 편이다. 그러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과 무덤 벽화에는 고구려시대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유물과 더불어 사후 세계에 대한 내세관을 알려 주는 것이 상당수 있다. 벽화에는 당시 귀족들의 생활을 보여 주는 주인 부부의 초상, 씨름이나 놀이하는 장면, 왕의 행렬 등이 그려져 있다. 또한 벽화에는 해 속의 세발까마귀(三足烏), 달 속의 두꺼비와 옥토끼 등처럼 죽은 이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실지로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세발까마귀가 도안된 것이 발견되기도 한다. 무덤에서 나온 관장식에도 새깃털모양이 있는 것은 당시 고구려에서 장례에 새깃털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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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탄 무사
말탄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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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구 중에서는 세잎장식무늬(忍冬文)와 T자형 무늬가 결합한 금동 장식과 원형·꽃잎 등이 맞새겨진 얇은 반달 모양의 금동 장식이 유명하다. 또 세잎장식무늬가 새겨진 산(山) 자 모양 금동 앞가리개와 새깃모양 솟은장식은 경주 황남대총과 의성 탑리 고분에서 비슷한 모양이 출토되어 상호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 평양 진파리 1호분에서 출토된 맞새김금동장식판에는 원래 나무 바닥판에 비단벌레의 날개를 깔고 가운데에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까마귀와 아래 위에 봉황, 용을 새겼는데, 베개의 마구리 장식에 쓰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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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봉황장식(왼쪽의 높이 12㎝, 운산 용호동 1호 무덤 출토)
금동봉황장식(왼쪽의 높이 12㎝, 운산 용호동 1호 무덤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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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걸이는 가는고리귀걸이(細環耳飾)와 굵은고리귀걸이(太環耳飾)가 있는데, 초기의 귀걸이는 평양 영화(永和) 9년명(353년) 벽돌무덤에서 나온 굵고 가는 고리만으로 만들어져 간단하였으나 차츰 고리 밑에 샛장식(中間飾)과 드리개장식(垂下飾)이 갖추어진 삼국시대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귀걸이는 백제, 신라, 가야에 전해져 다양한 형태로 제작된다.

띠꾸미개는 세잎무늬(三葉文)가 맞새김된 방형판에 하트 모양 드리개가 돌쩌귀로 연결된 것과 용무늬가 새겨진 것이 있다. 이들은 서진(西晉)의 띠꾸미개와 유사한 형태로 중국과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5세기 이후에는 세잎무늬와 초롱무늬를 맞새긴 방형판에 하트 모양 드리개가 연결된 전형적인 꾸미개가 출현하는데, 이것은 칠성산 96호 무덤과 우산하 3560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띠꾸미개는 신라로 전파되 어 신라의 전형적인 띠꾸미개로 정착한다. 띠꾸미개와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신발(飾履)이 있다. 신발은 목이 달린 것과 없는 것이 있는데, 모두 앞창이 약간 들리고 코가 도드라져 있다. 이것은 주로 바닥에 굵고 긴 못이 박힌 것으로 삼실총(三室塚) 벽화의 무사도에서 그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토기는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고 손잡이가 네 개 달린 항아리(四耳壺), 배부른단지, 깊은바리, 시루가 대표적인데, 대부분 납작바닥(平底)이다. 처음에는 갈색이나 검정 계통의 단지와 항아리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점차 고운 점토질의 바탕흙으로 물레를 써서 만들어 회색과 황갈색을 띠고 간단한 문양을 그리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중국 육조(六朝)의 영향으로 황갈색의 유약발린토기(黃褐釉土器)를 제작하였고 동진(東晋)에서 청자를 수입하였다.120)김기웅, 「고구려 토기」, 『한국사론』 15, 국사 편찬 위원회, 1985 ; 박순발, 「고구려 토기의 형성에 대하여」, 『충남 대학교 백제 연구소 제32회 공개 강좌 발표 요지』, 1988.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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