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4장 한국의 묘제와 변천
  • 2. 삼국시대의 묘제와 부장품
  • 백제의 묘제와 부장품
신광섭

백제 문화는 무령왕릉 출토 유물에서 보듯이 부드러우면서 섬세하고 격조가 있으며 국제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다. 백제에서는 불교가 크게 융성하여 많은 사찰과 탑이 세워지고, 불상 등이 제작되었다. 불교를 통하여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고, 한편으로는 일본에 전문 기술자와 불교를 전해 줄 만큼 문화적으로도 성숙하였다. 불교 외에도 도교 문화의 흔적이 백제금동대향로, 사택지적비, 산수무늬전돌 등에서 확인되었다.

백제의 무덤으로는 돌무지무덤과 나무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독무덤 등이 있다. 돌무지무덤은 한강 유역의 서울, 춘천, 양평, 연천 등지에서 확인된 것으로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연관이 있다. 초기에는 나무널무덤, 돌덧널무덤 같은 토착적인 무덤과 더불어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이 사용되다가 차츰 돌방무덤으로 전환하였다.121)박순발, 『백제 국가의 형성 연구』, 서울 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1988.

백제 초기의 무덤으로는 서울 석촌동 유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돌무 지무덤과 나무널무덤으로 이루어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개로왕(455∼475)조 기사에 “큰 돌을 욱리강에서 주워 석곽을 만들고 아버지 뼈를 묻었다(取大石於郁里河作槨 以葬父骨).”라는 기록이 돌무지무덤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4호 무덤은 바닥에 깬돌을 깔고 방형 석벽을 쌓아 올렸으며, 내부는 점토로 다져 쌓았고 다시 점토 위에 돌을 까는 방식으로 축조한 3단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가장 규모가 큰 3호 무덤도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크기나 묘의 특성을 볼 때 왕릉으로 여겨진다. 이 무덤에서는 중국제 황갈색자기병이 출토되어 축조 연대가 5세기 전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3호 무덤 동쪽에서는 대형 널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은 10m 길이의 널구덩이를 파고 8기의 널을 안치한 뒤 각 널 사이를 점토성이 강한 흙으로 채우고 전체 널구덩이를 흙으로 메운 다음 그 위에 다시 1∼2겹의 깬돌을 덮은 특이한 양식으로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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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고분
석촌동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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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 백제기에는 웅진으로 천도하면서부터 돌무지무덤 양식은 사라지고 ‘ㄱ’자형 돌방무덤과 직사각형 돌방무덤이 한성시대에 이어 계속 사용되었고, 더불어 중국 남조계 벽돌무덤도 새로이 만들어졌다. 돌방의 기본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으나 천장 구조는 변화가 많았는데 활천장이 이 시대 무덤의 큰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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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무덤방
무령왕릉 무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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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한 왕 또는 상류층의 무덤으로 국제 교류가 활발한 상황에서 백제에 전파되었다. 대표적인 벽돌무덤은 무령왕릉으로, 무덤의 절대 연대와 묻힌 왕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삼국시대 유일의 왕릉이다. 무령왕릉은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긴 벽돌을 이용하여 쌓은 벽돌무덤으로, 입구는 아치형이고 천장은 터널형이다. 그리고 벽에는 등감(燈龕)을 설치하여 백자등잔을 두어 무덤방에 불을 밝히는 데 사용하였다. 널길에는 무덤을 지키는 돌짐승(石獸), 지석(誌石), 오수전(五銖錢) 등이 놓였으며 무덤방에는 왕과 왕비의 널을 안치하였다. 도굴을 당하지 않아 백제 당시의 문화와 사회상을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 그대로 출토되어 고고학과 미술사학, 나아가 백제사 연구에 큰 진전을 가져다주었다.122)안승주, 「백제 고분의 연구」, 『백제 문화』 7·8, 공주 사범대학 백제 문화 연구소, 1975 ; 안승주·김영배, 「백제 석실분의 연구」, 『한국 고고학보』 10·11, 한국 고고학보 연구회, 1981 ; 강인구, 「한강 유역 백제 고분의 재검토」, 『한국 고고학보』 22, 한국 고고학회, 1989 ; 안승주, 「부여 지역의 백제 고분」, 『한국사론』 19, 국사 편찬 위원회, 1989 ; 이남석, 「백제 고분의 묘제 유형 고찰」, 『창해 박병국 교수 정년 기념 사학 논총』, 1994 ; 성낙준, 「옹관 고분의 분형」, 『호남 고고학보』 5, 호남 고고학회, 1997 ; 이남석,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백제 왕릉」, 『백제 문화』 27, 충남 대학교 백제 문화 연구소, 1997 ; 조현종·최상종, 「전남 지방의 백제시대 고분 문화와 그 유산」, 『전남 문화재』 9, 전라남도, 1997.

출토 유물 중 무령왕릉 돌짐승은 악귀(惡鬼)를 몰아내고 죽은 무령왕과 왕비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무덤 입구를 지키고 있다. 왕비의 나무관 쪽에서 발견된 청동다리미는 내세에서도 무령왕을 보필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상징적인 껴묻거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유리동자상, 탄화목제 동물 모양 패식(佩飾)이 각각 두 점씩 출토되었는데, 호신·벽사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석과 매지권(買地券)은 백제시대 장법(葬法)에 대하여 알게 해주었다. 지석에는 무령왕을 사망 후 27개월 만에 왕릉에 안치하였고, 왕비를 사망 후 28개월 만에 안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왕과 왕비의 주검을 빈전(殯殿)이나 가묘(假墓)에 잠시 안치하였다가 정식으로 능에 이장한 것인데, 이차장(二次葬)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석 위에서는 오수전이라는 동전 꾸러미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토지신에게 무덤 터를 사기 위해 실제로 사용하던 돈을 무덤 안에 넣었던 것으로, 중국에서 유행한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비 백제기에는 긴네모꼴의 돌방무덤이 널리 쓰이는데, 무덤의 입지가 산 중턱으로 옮겨지고 돌방은 L자형으로 파서 반지하나 지하에 만드는 육각형 단면의 능산리식 무덤이 유행하였다. 이 밖에 부여 지방에서는 독무덤과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화장무덤(火葬墓) 양식도 널리 쓰였다. 화장무덤은 불교식 장법에 따라 주검을 화장한 뒤 남은 유체(遺體)를 그릇에 담아 묻는 것이다. 이러한 무덤은 부여 지방의 도성 부근에서 발견되는데 삼국시대의 무덤이 도성이나 산성 외부에 조성되던 것과는 달리 도성 내부에서도 발견되어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백제가 불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었던 만큼, 불교를 신봉하던 귀족 집단 내부에도 화장 풍습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부여 염창리에서 발견된 호관(壺棺)도 특징적인 무덤의 하나로, 내부에서 귀걸이 등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한편 전남 지방에서는 늦은 시기까지 독무덤이 계속 유행하였다. 주로 영산강 하류 지역에 분포하는 독무덤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일반 성인의 주 검을 묻기 위해 큰 전용 독무덤을 특별히 만든 것이다. 보통 커다란 봉토 안에 독무덤이 여럿 들어 있고 그 주위에는 일반적으로 주구가 돌려져 있다. 초기에는 널무덤과 독무덤이 섞여 나타나다가 후기에는 독무덤 일색으로 바뀌는데, 5세기 후반이 되면 굴식돌방무덤이 등장하면서 그 뒤 독무덤은 점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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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동리 초분골 독무덤
내동리 초분골 독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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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남 지방에서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형태가 유사한 장고형(長鼓形) 고분이 발견되었다. 큰독무덤의 봉토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점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나, 일본 열도에서 크게 유행한 전방후원분과도 상호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장고형 고분은 거의 백제계 굴식돌방무덤이며 출토 유물 가운데 원통형 토기(埴輪) 등 일본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것들이 있어 관심을 모았다. 백제의 무덤이 지역마다 특색이 있듯이 출토 유물도 지역마다 다양하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당시 실생활에 사용하던 제품을 그대로 넣은 것과 무덤에 부장하기 위해 따로 제작한 것이 있다. 실생활에 사용하던 물건은 죽은 이가 생전에 사용하던 도구나 위세품으로 죽은 이의 생전 세계를 알 수 있다. 무덤에 부장용으로 넣은 것 은 죽은 자를 위하여 다시 제작한 것으로 죽은 자의 후손이 부모를 위하여 만들어 넣은 것이다. 이와 같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로 당시 실생활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숭배하는 의식도 알 수 있다.123)김낙중, 竹谷俊夫 옮김, 「5∼6세기의 영산강 유역에 있어서의 고분의 성격-나주 신촌리 구호분, 복암리 삼호분을 중심으로-」(日文), 『朝鮮學報』 79, 朝鮮學會, 2001 ; 박순발, 吉井秀夫 옮김, 「영산강 유역에 있어서의 전방 후원분의 의의」(日文), 『朝鮮學報』 79, 朝鮮學會,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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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동 장고형 고분
명화동 장고형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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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일대에서는 새모양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고대 사회에서 새는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나르는 매개자일 뿐만 아니라 곡식을 나르는 곡령신(穀靈神)과 관련이 있다. 이로 보아 새모양토기는 풍요와 영혼의 안식을 바라는 의례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가 전파된 뒤에는 불교와 관련 있는 도안이 유물에 남겨져 있다. 무령왕릉에서는 연화문(蓮花文)이 있는 기와와 정병에서 연꽃이 솟아나는 장식을 가진 왕비의 관장식(冠裝飾)과 같이 불교와 관계가 깊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덤에 묻힌 유물에는 당시 사회상뿐만 아니라 관념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많이 있다.

백제 금속 공예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무덤에서 출토된 다양한 꾸미개들이다. 그 중에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관장식은 금판을 오려 만들었는데, 세잎무늬장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꽃가지에 달개장식을 달았 고, 왕비의 관장식은 중앙의 연꽃무늬받침 위에 꽃병을 배치하였다. 그 밖에 은꽃모양장식은 얇은 은판을 접어 꽃모양으로 오린 것으로 부여 능산리, 논산 육곡리, 남원 척문리, 나주 흥덕리 등 백제의 전 영토에서 출토되어 백제 관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지방 수장의 관장식으로는 나주 신촌리 9호분과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나온 금동관이 있다.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은 나뭇가지와 풀꽃무늬를 도안한 것이고, 입점리 금동관은 대롱이 달린 관장식으로 가야와 일본의 무덤에서도 동일한 모양이 출토되어 한일 양국 간의 고대 문화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이다. 백제의 금동신발은 공주 무령왕릉·수촌리, 나주 복암리·신촌리, 익산 입점리 등 왕릉이나 수장급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거북등무늬나 마름모무늬, 물고기 장식 등으로 장식하여 화려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백제의 토기는 이전의 전통적인 제작 기법을 바탕으로 낙랑과 고구려의 토기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만들었는데 바탕흙과 빛깔에 따라 대체로 적갈색연질토기, 검은색토기(黑陶), 회청색토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검은색토기는 4세기경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그릇의 표면을 갈아 검은 빛깔이 나며, 주로 수장급의 무덤에서 나왔다. 가장 보편적으로 출토되는 토기는 다리가 3개 달린 세발토기(三足器)로 백제의 전 영토에서 출토되었다.124)박순발, 「백제의 국가 형성과 백제 토기」, 『백제 논총』 6, 백제 문화 개발 연구원, 1997 ; 김용민, 「백제 사비기 토기에 대한 일 고찰-부소산성 출토 토기를 중심으로-」, 『문화재』 31, 1998 ; 최완규, 「백제 토기의 지역적 양상」, 『한국 고대 문화의 변천과 교섭』, 서경 문화사, 2000 ; 김종만, 「사비시대 백제 토기와 사회상」, 『백제 연구』 37, 충남 대학교 백제 연구소, 2003.

백제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은 중국제 유물이다. 중국제 유물은 천안 화성리의 청자항아리, 원주 법천리의 양형청자(羊形靑磁), 공주 수촌리와 천안 용원리의 계수호(鷄首壺)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지역의 수장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중국 남조와 백제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백제 지역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소형 철제 농기구 모형도 특색이 있다. 이것은 백제의 금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 대가야 지역에서도 출토되는데, 대체로 4세기 초에 금강 유역에서 출현하여 5∼6세기를 지나면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모형 농기구란 실제 사용하는 농기구를 모델로 하여 3∼10㎝ 정도 크기로 작게 만든 것으로, 낫, 살포, 따비, 도끼 등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실용 농기구를 상징화한 의례 도구이거나 껴묻거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용구일 것이다. 이렇듯 철제 농기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 껴묻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사회에서 농업을 상당히 중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형 농기구는 지역 지배자의 무덤에만 다량으로 껴묻히는데, 지배자가 농업 생산에 필요한 농기구를 분배하고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 의례를 주도하는 등 경제적 기반인 농업 생산력을 장악하였음을 말해 준다. 한편 신라 지역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실제 사용하던 철제 농기구가 그대로 무덤에 껴묻힌 것으로 보아 철제 모형 농기구는 백제·대가야 지역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125)홍보식, 「백제와 가야의 교섭」, 『백제 문화』 27, 공주 대학교 백제 문화 연구소, 1998.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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