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4장 한국의 묘제와 변천
  • 2. 삼국시대의 묘제와 부장품
  • 가야의 묘제와 부장품
신광섭

가야는 변한을 기반으로 성립한 여러 세력 집단으로, 하나의 통일된 집권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562년에 대가야를 마지막으로 모두 신라에게 병합되고 말았다. 가야 문화는 신라 문화와 동질적인 문화 기반에서 출발하였으나 낙동강을 경계로 차츰 문화의 차이가 뚜렷해진다. 신라 문화가 돌무지덧널무덤, 직선적인 맵시의 토기, 맞가지모양금관 등 화려한 금제품으로 대표된다면, 가야 문화는 돌덧널무덤, 부드러운 곡선미의 토기, 은상감 제품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가야 무덤의 형태는 대체로 나무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순으로 변천하였으며, 낙동강 주변뿐만 아니라 지리산 너머의 남원, 임실, 진안 등지에서도 확인되었다. 이러한 무덤 양식은 기본적으로 원삼국시대의 여러 무덤 형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가야의 지역마다 특색을 띠며 변천하였다. 이 중에서 돌덧널무덤은 가야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이것은 낙동강을 사이 에 두고 동쪽의 신라 지역에서는 직사각형의 돌덧널이, 서쪽의 가야 지역에서는 좁은 직사각형의 돌덧널이 만들어져 두 지역의 차이를 반영하였으며, 가야 지역 안에서도 세부적인 차이가 보인다. 창녕, 고령, 경산 등에서는 무덤 주위에 호석을 둘러 주는 경우가 많으며, 구암동과 창녕에서는 돌덧널의 윗면 전체를 냇돌로 덮어 준 것이 발견되고 있어 신라의 돌무지돌널무덤과의 관련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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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동 53호 무덤 으뜸 덧널
복천동 53호 무덤 으뜸 덧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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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방무덤은 백제 무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널방과 널길을 가지고 있다. 이 무덤들은 대체로 평면방형 내지 직사각형의 현실을 깬돌로 쌓아 올려 터널형 내지는 돔형태로 만든 것이다. 대가야 문화권에 주로 분포하는데 처음에는 고령 지역의 특색 있는 유물이 껴묻히다가 신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 양식의 유물로 바뀌게 된다.

이렇듯 가야의 무덤은 각 문화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고분마다 조영(造營) 시기를 대표하는 각종 유물이 껴묻혀 있어 가야 문화는 물론 고대 국가의 대외 교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야 지역의 무덤 중 합천 옥전 고분군은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 다양한 종류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양한 계통의 유물이 출토되는 가야 지역의 대표 무덤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서는 대가야 유물이 주로 출토되지만, 백제·신라의 영향을 받아 가야 나름의 것으로 다시 제작된 것도 나오는데, M3호 무덤에서 출토된 용봉무늬고리자루큰칼이 그러한 독자성이 있는 우수한 유물이다. 6세기 중엽 이후에는 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옆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이 나타나고 백제계의 굴식 돌방무덤 도 축조되는데, 이후 대형 무덤 축조는 중단되었다. 옥전 고분군은 대가야국의 일원이면서 백제·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지만,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우수한 문화를 지닌 다라국(多羅國)의 면모를 잘 반영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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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동 고분군과 주산성
지산동 고분군과 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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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 수량도 가장 많고 특징적인 것은 철제품인데, 이것에서도 가야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철제품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많은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과 무기로, 당시 가야의 작은 나라들 사이에 전쟁이 많이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철제품 중에서 철판을 오려 만든 미늘쇠(有刺利器)에는 작은 새를 오려 붙였다. 이 새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천상 세계로 실어 나르는 신앙과 관련이 있다. 또한 가야의 무덤에서는 백제계 유물에서 보이는 것처럼 쇠도끼, 낫, 살포 등 다양한 종류의 도구를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 껴묻었다. 이것은 실생활 도구를 그대로 작게 만든 것으로 죽은 이가 사후에도 현실 생활을 유지하게 하려는 내세관과 함께, 농업을 중시하는 풍조를 알 수 있다.126)강현숙, 「가야 석곽묘 연구서론-구조를 중심으로-」, 『한국 고고학보』 23, 한국 고고학회, 1989 ; 이은창, 「가야 고분 연구 상, 하-고분의 분석, 입지, 구조, 양식 등을 중심으로-」, 『국사관 논총』 5·6, 1989 ; 조영제, 「옥전 고분군의 계층 분화에 대한 연구」, 『영남 고고학보』 20, 영남 고고학회, 1997 ; 김세기, 『고분 자료로 본 대가야』, 계명 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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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전 M3호 무덤
옥전 M3호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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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지역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농기구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살포이다. 살포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우리나라 특유의 농기구로서, 김매기할 때 사용한다. 살포의 등장으로 U자형 따비(갈이), 살포(김매기), 낫(걷이)이라는 단계적인 지배층의 농기구가 완성되었다. 수장층의 무덤인 옥전 M3호에서 출토된 살포는 논농사를 장악하고 통치하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여러 가야 중에서 대가야 지역의 무덤에서는 봉토 주위에 토기를 깨뜨려 묻은 제사 유구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토기를 깨뜨리는 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토기를 깨뜨리는 행위는 주위를 정화(淨化)하는 풍습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한편, 무덤 내부에 부장된 토기 중에도 토기 입술 부분이나 다리 부분에 의도적으로 조각을 낸 것이 있어 대가야 지역에서 토기를 깨뜨리는 의식이 상당히 퍼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야의 꾸미개는 가는 고리에 둥근 중간 장식이 사슬 모양의 연결구로 드리개에 연결된 형태로, 단순하면서도 세련미가 뛰어나다. 귀걸이는 처음 고령, 합천 지역을 중심으로 사용하다가 차츰 함양, 진주, 고성 등지로 퍼져 나갔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호화로운 장식이 더해졌다. 가야의 관은 금관도 있으나 주로 금동제로 관테 위에 풀꽃형(草花形) 또는 나뭇가지형(樹枝形)의 솟은 장식을 달고 있다. 고령 지산동 32호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관테의 중앙에 불상 광배 모양의 솟은 장식을 세웠는데, 일본 후쿠이 현(福井縣) 이본송산(二本松山) 무덤에서 나온 은제도금관(銀製鍍金冠)과 형태가 유사하여 서로 교류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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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모양토기(왼쪽의 높이 16㎝, 부산 복천동 53호 무덤 출토)
짚신모양토기(왼쪽의 높이 16㎝, 부산 복천동 53호 무덤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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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토기에는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경질 토기와 낮은 온도에서 구운 적갈색 연질 토기가 있다. 모두 신라 토기와 비슷하나 세련되게 만들었다. 경질 토기는 처음에 와질 토기의 모양을 이은 둥근밑항아리, 귀달린항아리 등의 항아리를 중심으로 만들다가 점차 다양한 모양의 토기를 제작하였는데, 이단 굽구멍에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이는 굽다리접시처럼 세련된 곡선미를 특징으로 하는 가야 토기로 발전한다. 이에 비해 신라 토기는 직선적이고 강인한 인상을 준다.127)이은창, 「가야 토기」, 『한국사론』 17 한국의 고고학 Ⅳ, 국사 편찬 위원회, 1987 ; 안춘배, 「가야 토기의 연구-지역적 특징을 중심으로-」, 『영남 고고학보』 9, 1991 ; 박광춘, 「가야 토기의 지역색 연구」, 『한국 상고사학보』 24, 한국 상고사학회, 1997 ; 박승규, 「대가야 토기의 확산과 관계망」, 『한국 고고학보』 49, 한국 고고학회, 2003.

가야가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배경의 하나로 풍부한 철(鐵)과 생산 체계의 장악을 들 수 있다. 원삼국시대 이래 가야인의 교역 활동에는 항상 철이 매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덩이쇠는 얇고 길쭉한 모양으로 철기 제작의 원료이면서 화폐로도 사용되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크기가 차츰 작아졌다.

가야의 공격용 무기로는 칼, 창, 살촉 등이 있다. 가야의 큰칼로는 아직까지 신라 지역의 특징적인 세고리식 고리자루칼(三累環頭大刀)이 출토된 적은 없으며, 주로 용이나 봉황을 새긴 고리자루칼(龍鳳文環頭大刀)과 세잎고리자루칼(三葉環頭大刀)이 큰 무덤에서 나왔다. 철로 만든 갑옷과 투구는 가야 전사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데, 갑옷은 보병용의 판갑옷(板甲)과 기병 용의 비늘갑옷(札甲)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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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갑총 말갑옷 출토 상태
마갑총 말갑옷 출토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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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갑옷은 4세기부터 정형화되어 성행하였는데, 판갑옷은 대성동 고분군과 복천동 고분군 등 대형 무덤에서만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당시의 갑옷은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과 함께 권력을 상징하는 하나의 도구로써 무덤에 껴묻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5세기 이후로는 작은 무덤에서도 갑옷이 출토되는데 비늘갑옷이 대부분이고, 6세기 중엽 이후로는 갑옷 매장 풍습이 점차 사라진다. 이것은 갑옷의 필요성과 실용성은 증대되어 가지만, 권력의 상징물로서의 의미가 퇴색되었기 때문에 무덤에 껴묻히는 수량이 줄어든 것이다.

또한 말의 몸도 철로 무장하여 말얼굴가리개(馬胄)와 말갑옷(馬甲)을 갖출 정도였다. 말을 장식하는 데 사용하는 것으로는 말안장, 말걸이,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말방울 등이 있다. 신라의 말갖춤이 호화로운 장식으로 꾸며진 반면에 가야의 말갖춤은 실용적인 면을 중시하였다. 가야의 말갖춤 중에서 삼국과 다른 특징이 있는 것은 F자형 발재갈과 칼날 모양 말띠드리개이다. 이것은 신라 지역의 하트 모양 재갈과 물고기지느러미모양 말띠드리개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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