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4장 한국의 묘제와 변천
  • 2. 삼국시대의 묘제와 부장품
  • 신라의 묘제와 부장품
신광섭

신라는 경주의 사로국이 주변의 작은 나라를 아우르며 발전한 나라이다. 4세기 내물왕 시기에 왕권 국가로 발돋움한 신라는 6세기에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신라 문화는 진한의 토착적인 문화를 기반으로 고구려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발전하였다. 백제와 달리 중국 문화를 직접 수용하기보다는 고구려, 백제를 거쳐 도입하였다. 그러나 7세기 이후에는 중국 당나라와 직접 교섭하여 당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통일 신라 문화를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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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발굴 광경
황남대총 발굴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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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무덤은 나무널무덤 위를 돌로 덮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경주 시내 곳곳에 산처럼 솟아 있다. 이러한 무덤에는 금관을 비롯해 화려한 금은제 장신구, 용기류, 유리 제품과 각종 철기, 토기 등이 많이 묻혀 있었다. 특히 대형의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마립간 시기인 5∼6세기경에 왕이나 왕족 등 지배 세력이 축조한 것이다. 그동안 조사된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있다. 이 밖에 나무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 다양한 형태가 보이나 이러한 무덤들은 다른 지역에도 보이는 것이다.128)최병현, 「신라 성장과 신라 고분 문화의 전개」, 『한국 고대사 연구』 4, 1991.

돌무지덧널무덤은 구조상 이미 매장이 끝난 무덤에 추가장(追加葬)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합장하려는 경우, 추가장이 아닌 한 고분 안에 덧널을 추가하거나 먼저 만든 무덤에 아주 근접하게 고분을 축조하여 친연 관계를 표시하 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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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동 고분
구정동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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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구정동 무덤은 신라 초기의 무덤으로 언덕을 봉토로 이용한 특이한 구조이다. 땅 위에 긴 네모꼴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을 만든 뒤, 그 안에 나무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형식이다. 1m 간격을 두고 두 기의 유구가 합장되어 있어 부부묘로 추정되는데, 북쪽 유구에서는 철제 무기와 함께 판갑옷이, 남쪽 유구에서는 80㎝ 길이의 투겁창 수십 개가 바닥에 깔려 있어 특이한 매장 방법을 보여 주었다. 구정동 무덤은 원삼국시대의 널무덤과 신라의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 사이에 놓인 과도기적 형태로 주목할 만하다.

금령총(金鈴塚)은 지름 18m, 높이 4.5m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1924년에 발굴하였을 때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구조를 처음 밝혀낸 무덤으로서 의의가 크다. 금관과 함께 금방울이 발견되어 금령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무덤구덩이의 바닥에 큰 냇돌을 두 겹으로 놓고, 그 위에 잔깬돌을 깔고 동서 5m, 남북 3.4m, 높이 1.5m의 덧널을 짜 넣은 뒤, 널 위에 큰돌을 채워 넣고 흙을 덮는 구조이다. 이 무덤은 규모가 크지 않은데도 금관, 허리띠, 귀걸이 등 화려한 유물이 많으며 특히 허리띠, 금관 등의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어린 왕자의 무덤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 천마도가 출토되어 유명한 천마총은 1973에 학술적인 발굴을 실시하였는데, 무덤을 조성하고 유물을 껴묻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매장 중심부인 나무널 위에 토기를 놓고, 남벽 위에 금귀걸이와 구슬을 놓은 것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주검이 들어 있는 널을 안치한 다음 나무널의 뚜껑을 닫고 돌을 덮기 전에 의례적인 행사를 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봉토 정상에서는 1.2m 깊이에서 말 장신구(馬具)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초기 무덤의 실제 말 매장을 대신하는 상징적인 순장의 의미가 있다는 견해가 있다. 즉 무덤 주인공의 영혼이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매장이 끝난 뒤에 마구를 무덤 정상부에 껴묻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무덤을 덮고 있는 돌이 내려앉으면서 유물을 덮어 도굴이 불가능할 정도여서 대부분의 유물이 도굴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경주 지방은 토양이 산성이기 때문에, 무덤 주인공의 시신은 완전히 썩어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유물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금으로 만든 것으로 이전 시기의 구슬로 만든 것이 많았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일부 연구자는 유라시아 유목민의 황금 문화와 관련을 짓기도 한다. 황금 제품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금관에 보이는 도안과 관념이다. 신라 금관은 나뭇가지 모양 장식과 사슴뿔 장식으로 도안한 것으로, 나뭇가지와 사슴은 유라시아 초원의 길에 위치한 여러 민족이 숭배하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샤먼들이 신과 통교(通交)를 할 때 매개 역할을 하 던 것이다. 신라에서 왕이 금관을 착용하였다는 것은 신과 통하는 존재로서의 왕을 상징하는 것이다.129)최병현, 「고신라 적석목곽분의 변천과 편년」, 『한국 고고학보』 10·11, 한국 고고학 연구회, 1981 ; 이상수, 「영동 지방 신라 고분에 대한 일 고찰」, 『한국 상고사 학보』 18, 1995 ; 지건길, 「왕경 지역 신라 고분의 형성 과정」, 『신라 왕경 연구』, 신라 문화 선양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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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높이 27.5㎝, 경주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관(높이 27.5㎝, 경주 황남대총 북분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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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은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天馬圖)이다. 천마도는 말다래(障泥)에 그린 그림으로 황남대총의 소 그림, 천마총의 서조도(瑞鳥圖) 등과 함께 삼국시대 신라에서 그린 몇 안 되는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말다래는 말이 달릴 때 진흙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천마도는 자작나무껍질을 겹쳐서 만든 것인데, 하늘을 나는 천마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어 천마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말다래의 서수(瑞獸)가 천마가 아니라 상상의 동물인 기린이라는 주장이 있어 논쟁이 있었다.

그림과 더불어 무덤에는 문자가 새겨진 용기가 있다. 서봉총에서 출토된 청동 그릇 중에는 ‘연수(延壽)’라는 고구려 연호가 새겨진 것이 있고, 호우총에서는 청동 그릇의 바닥에 ‘광개토지호태왕(廣開土地好太王)’이라고 새겨진 것이 있다. 후자는 광개토 대왕의 무덤에 사용한 그릇이 신라에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호우총은 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릇은 제작된 뒤 100여 년이 지나 신라의 무덤에 묻힌 것이다. 이러한 그릇은 고구려에게 정치·문화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고대 일본인이 신라에 대해 ‘눈부신 금·은의 나라’라고 썼듯이 신라 사람들은 꾸미개로 금, 은, 금동을 선호하였는데 관모, 귀걸이, 팔찌, 목걸 이, 반지, 허리띠 등 종류도 다양하였다. 신라의 금관은 대부분 관테의 중앙에는 산 자형으로 솟은장식(山字形立飾)을, 뒷면 양쪽에는 사슴뿔장식(鹿角形立飾)을 세운 것으로 표면에는 곱은옥과 달개장식을 붙여 장식하였으며 관 정면의 양쪽에는 드리개(垂飾)를 늘어뜨려 호화롭게 꾸몄다. 금관과 항상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금·은제 허리띠가 있다. 허리띠는 대개 위는 네모꼴 판이고, 밑은 하트형인 띠꾸미개를 표면에 이어 붙인 가죽띠나 천으로 된 허리띠 표면에 10개 내외의 띠드리개 장식이 늘어뜨려져 있는 형태이다. 황남 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것은 덩굴무늬를 맞새김한 방형판과 하트형을 맞새김한 금판으로 연결한 것이다. 귀걸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경주 부부무덤에서 출토된 굵은고리귀걸이로 굵은고리에 거북등과 꽃무늬를 금 알갱이로 장식한 것이다.

양산 금조무덤(金鳥塚)에서 발견된 금으로 만든 새다리(金製鳥足)는 조령 신앙(鳥靈信仰)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본다. 금족은 새 모양으로 생긴 물건의 다리 부분으로 추정되는데, 몸체 부분은 썩어 없어지고 다리만 남은 것이다. 작은 돌방무덤에 걸맞지 않게 금동관 두 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청동 다리미의 뚜껑 꼭지에도 새가 장식되어 있다. 원삼국시대의 오리모양토기에서 나타나듯이 새가 표현된 유물을 무덤에 껴묻음으로써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에 전달해 주기를 기원하거나, 무덤의 주인공이 여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아 조령 신앙과 깊은 연관이 있는 인물의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신라 무덤에서 나온 것 중에서 특징적인 것은 유리 그릇이다. 유리 제품은 주로 지중해나 흑해 주변에서 출토되는 로마 유리와 형태, 제작 수법이 유사하기 때문에 서역에서부터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유리 그릇 중에는 독자적인 특색이 있거나 제작 기법을 보인 것도 있어 서역의 것을 모방하여 신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신라 무덤에서는 서역과 관련된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식리총(飾履塚)에서 나온 금동신발에는 서역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문양인 거북등껍질무늬(龜甲文), 연꽃무늬(蓮花文), 상서로운새무늬(瑞鳥文) 등이 조밀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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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모양토기(오른쪽의 높이 9.8㎝, 경주 금령총 출토)
배모양토기(오른쪽의 높이 9.8㎝, 경주 금령총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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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토기는 물레를 이용하여 빚은 토기를 굴가마 안에 넣고 1,000℃ 이상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것으로, 가야 토기와 달리 직선적이고 강인한 인상을 준다. 많이 출토되는 굽다리접시는 굽이 날씬하고 사다리꼴 굽에 네모난 구멍을 위아래에 엇갈리게 뚫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목항아리와 굽다리접시에는 동물이나 인물을 조그맣게 만들어 붙이기도 하였다. 토우(土偶) 중에는 사냥하는 인물, 가야금을 타는 사람, 성행위를 하는 장면 같은 생활 모습과 개구리를 쫓는 뱀, 임신한 여인상 등 다산과 풍요를 의미하는 주술적인 것도 들어 있다.130)최병현, 「신라 토기」, 『한국 미술사의 현황』, 1992 ; 양경애, 「신라 고분 출토 토우의 복식 연구」, 『박물관지』 2, 1993 ; 이희준, 「토기에 의한 신라 고분의 분기와 편년」, 『한국 고고학보』 36, 한국 고고학회, 1997.

신라 무덤에서는 벼알 또는 벼이삭이 출토되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동옥저조에는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낼 때 토기 항아리에 쌀을 넣어 죽은 이의 곁에 두는 습속이 있다고 하였다. 고고학적으로도 경주 미추왕릉 지구의 무덤과 황남대총, 식리총, 대구 달서 51호 무덤, 성주 성산동 무덤 등에서 토기에 담기거나 껴묻거리에 붙어 있는 벼이삭이나 벼알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적어도 신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벼를 껴묻는 장례 풍습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쌀이 아닌 벼를 껴묻는 것이 내세에서 농사지을 종자의 의미인지 죽은 이의 환생과 관련된 곡령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당시 신라 사회에서 벼농사가 매우 중요하였고, 이것이 내세적인 관념에까지 투영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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