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4장 한국의 묘제와 변천
  • 4. 고려시대의 묘제와 부장품
신광섭

고려시대는 거란, 여진, 몽고족의 잇따른 침략을 받아 많은 문화 유산이 유실되기도 하였으나 개경의 귀족 문화와 지방의 호족 문화가 조화를 이루었다. 고려시대에는 전 시기 동안 불교 문화가 귀족뿐만 아니라 서민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널리 퍼져 있었다. 유교 문화도 지식 관료층을 중심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원의 간섭기인 고려 후기에는 중국에서 성리학이 도입되어 점차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해 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이전 시기와는 달리 상례(喪禮) 제도에 대한 정보가 문헌에 남아 있는 편인데, 유교 문화가 전해지면서 가까운 친족이 상을 당하였을 때 입는 옷과 기간을 제도화한 오복(五服)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불교식과 유교식이 결합되어 사용되었는데, 오복 제도의 경우 실제 운영할 때는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해 상(喪) 기간을 단축하여 삼년상(三年喪) 등의 원칙이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한편 무덤을 마련하고 안치하는 매장은 주로 3일이 지나서 하는 것(三日葬)이 보편적인 관행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삼일장은 화장을 하지 않을 경우이며, 화장하면 장기(葬期)가 비교적 길어졌다. 묘지명의 내용을 참고해 보면, 보통 먼저 화장한 뒤 9개월에서 1년 3개월 정도 있다가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무덤은 돌방무덤, 돌덧널무덤, 토광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회 계층과 신분에 따라 채택하는 무덤의 양식이 다른데, 이것은 각 신분의 사회·경제적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135)엄익성, 「고려시대 고분에 대한 일 고찰」, 『고려시대의 용인』, 학연 문화사, 1999 ; 이희인, 「중부 지방 고려 고분의 유형과 계층」, 『한국 상고사 학보』 45, 2004.

돌방무덤은 왕릉을 중심으로 하여 개성의 주변 지역과 강화 지역에 고분군을 형성하였다. 왕릉은 풍수지리 사상에 입각한 전형적인 명당에 위치하였고, 무덤에 십이지상을 새긴 호석을 돌렸다. 그리고 무덤 주변에는 돌로 된 난간을 돌렸고, 정면에는 석상(石床)과 촛대 모양으로 깎아 세운 석물인 망주석(望柱石)을 좌우에 배치하였다. 이 밖에 장명등, 문인상·무인상, 돌사자 등을 배치하였다. 돌방 바닥에는 벽돌(塼)을 깔고 중앙에는 널받침대를 놓았으며, 회칠을 한 네 벽에는 사신도와 십이지상이 그려져 있다.136)장호수, 「개성 지역 고려 왕릉」, 『한국사의 구조와 전개-하현강 교수 정년 기념 논총-』, 하현강 교수 정년 기념 논총 간행 위원회, 2000.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은 개풍군 수락암동 1호 무덤처럼 왕릉의 규모에 비견될 만한 것도 있었다. 이 무덤에서는 돌방벽 아랫부분에 사신도를 그리고, 그 윗부분에 십이지상을 그렸다. 이렇듯 돌방무덤은 사회의 상위 계층이 쓰던 무덤 양식으로 일정 지역에 분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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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릉 근경
공민왕릉 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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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귀족 사회에서는 화장하면 6매의 판돌로 조립하는 작은 석관(石棺)을 사용하였다. 크기는 대개 1m를 넘지 않으며, 작은 판돌에 구멍을 뚫어 큰 판돌을 끼워서 조립하고 바닥돌에는 홈을 파서 물리게 하여 상자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석관에 화장골재(火葬骨灰) 또는 유골(遺骨)을 넣어 무덤에 안치하였다. 석관 뚜껑이나 네 면에 보통 연꽃, 당초문, 사신도 등을 새겨 넣어 내세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하였다. 1114년에 만들어진 허재(許載)의 석관은 고려시대 석관을 대표하는 것으로, 외부에는 십이지상과 사신도를 그리고 내부에는 묘지문(墓誌文)을 새긴 형식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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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리 22호 돌덧널무덤
수천리 22호 돌덧널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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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덧널무덤도 돌방무덤과 마찬가지로 무덤터로 선호되는 음택지(陰宅地)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의 주인공 또한 일정한 수준 이상의 사회·경제적인 지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돌덧널무덤은 토광묘와는 달리 무덤을 축조하는 데 어느 정도 경제적 여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관리 신분을 나타내는 허리띠장식이 돌덧널무덤에서만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돌덧널무덤이 하급 관료나 군인, 지방 향리 등 사회의 중간 지배층의 무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무덤 양식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토광묘가 널리 사용되었 다는 점이다. 토광묘는 일반 백성의 무덤으로 여겨지는데, 단순히 구덩이를 파서 주검을 묻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청자 등을 껴묻는 등 일정한 형식을 갖추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일반 백성도 일정한 형식을 갖춘 무덤을 축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토광묘는 생활공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성하였고, 돌덧널무덤에 비해 대규모의 공동 묘역을 형성하였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는 “대소민들의 무덤이 성의 사대문 부근에 있다.”라고 하였고, 토광묘 분포 지역은 생활 근거지에서 멀지 않은 능선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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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리 18호 돌덧널무덤 유물 출토 상태
수천리 18호 돌덧널무덤 유물 출토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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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시대의 극빈층, 즉 가난한 사람들은 풍장(風葬) 같은 자연적인 처리 방식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당시 사회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만약 가난한 사람이 장구(葬具)가 없으면 들 가운데 버려두고 봉분도 만들지 않고 나무도 심지 않으며, 개미와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도 이를 탓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었다. 즉 무덤을 축조하고 껴묻거리를 넣을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시신을 처리하였음을 문헌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무덤의 껴묻거리는 청자와 토기, 대접·거울·합·수저 등 청동 제품, 인장(印章), 구슬과 동곳 같은 장신구 등 다양한 편이다.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쓰던 물건을 그대로 부장한 것이다. 이 중 대접과 청동 숟가락은 고려시대 고분의 가장 일반적인 껴묻거리 조합이며, 청동 거울과 가위도 표지적인 유물로 벽사(辟邪)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출토되는 동전은 중국 제품으로 당시 고려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덤 주인공의 노잣돈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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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녕 옹주 묘지석
수녕 옹주 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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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후로는 일반적으로 묘지석(墓誌石)이 무덤에 껴묻히게 되는데, 묘지(墓誌)란 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등을 적은 것이다. 묘지석을 묻는 이유는 훗날 천재(天災)나 인재(人災) 등으로 무덤이 파손되었을 때 누구 무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무덤 남쪽에 묻는 것이다. 일정한 형식 없이 석관에 직접 기록하기도 하며 직사각형의 검은돌(烏石)이나 점판암 판돌에 기록하였는데 사발, 자연석, 번와한 자기, 반죽한 석회, 굳은 점토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묘지는 기록된 내용을 보고 무덤 주인공의 행적은 물론이고, 고려시대의 사회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고려시대 무덤에서는 청동 거울도 많이 출토되었는데, 쌍룡구름무늬, 쌍학구름무늬, 보화무늬, 꽃·새무늬, 유희동자누각무늬 등 무늬가 다양하다. 출토된 인장은 대부분 청자나 청동으로 만든 것인데, 동물 모양을 장식하여 미적 감각을 더했다. 특히 충주 가흥리에서 출토된 도장 윗면에는 ‘숭경이년삼월(崇慶二年三月)’이, 측면에는 ‘행군만호방자옥지인(行軍万戶傍字 獄之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도장 날인 면에도 전서체의 ‘행군만호방자호지인(行軍万戶傍字號之印)’이란 글자가 있다. 숭경 2년은 1213년이며, 만호는 고려시대 지방 육군 병단의 한 단위로 행군만호와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청자, 청동기, 목기, 질그릇 등이 신분이나 생활의 차이에 따라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매병, 정병, 유병을 비롯한 다양한 병, 주전자 등은 그 모양이 비슷하다. 고려 토기는 제작 과정에서 나타나는 타날기법(打捺技法)에 따른 문살무늬나 물결무늬가 일부 보이나 대부분 문양이 없다. 바탕흙은 점토를 이용하며, 회청색의 경질 토기를 주로 만들었다. 바닥에는 일부 굽이 있으나 대부분 편평하다.

출토 유물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청주 명암동 나무널무덤에서 나온 ‘단산오옥(丹山烏玉)’명 먹으로 무덤에서 처음 발견된 고려시대 먹이다. 먹은 아랫부분이 갈려 있고 먹집게로 집은 흔적이 있어 실제 사용하던 것을 무덤에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장자의 머리맡에는 먹을 비롯한 ‘제숙공(濟肅公)’이 새겨진 청동젓가락과 철제가위도 놓여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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